2019/12/21 21:14

윤희에게 극장전 (신작)


그리움이 서린 삶. 왠지 모르게 슬퍼보였던 한국의 윤희와 일본의 쥰. 그 둘에게 서린 실체 없는 슬픔이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인지에 대해서, 영화는 쉽게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저 둘 사이에 이런 일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 하게만 할뿐. 그 둘의 사랑과 이별은 영화가 비추지 않은 과거에만 있다. 현재 영화상에서 그 둘에게 존재하는 것은 오롯이 남겨진 그리움 하나뿐.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주인공이 이렇게 침울해하는지 후반부까지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영화. 비슷한 예로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다름 아니라 <맨체스터 바이 더 씨>다. 평가도 좋았고 여러모로 잘 만든 영화였음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내 취향은 아닌 작품이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주인공이 슬퍼하는 이유를 거의 끝까지 알려주지 않다가 후반부가 되어서야 알려줬던 점 때문에. 영화를 보는내내 복장 터졌었지, 대체 저 놈은 왜 그리 죽상인가 하고. 

<윤희에게>도 비슷한 전개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맨체스터 바이 더 씨>처럼 지루한 느낌은 별로 없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윤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딸의 캐릭터, 그리고 전 남편의 이야기. 또다른 주인공인 쥰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고모와 그녀가 새로 사귀게 된 친구의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이 교차편집되어 진행되기 때문에 영화가 별로 지루하지 않게 느껴진다. 물론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주인공이 겪는 슬픔의 이유가 예상치 못하게 구체적이었기 때문에 추측하기 더 어려웠던 것도 있다. 그에 반해 이 영화는 성별만 남녀가 아닌 퀴어 영화일 뿐 그저 사랑 이야기를 잔잔하게 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그 맥과 정서가 어느 정도 쉽게 짐작되는 편.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엔 오타루가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경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마당 이 시국에 그리 적절하지 못한 발언일 수는 있겠으나, 그런 거 그냥 다 떼고 보면 이 영화에서 정말로 괜찮은 지점이다. 여행 영화로써의 정체성도 잘 버무려져 있는 것. 사실 여행 영화라는 개념을 가진 영화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파리의 에펠탑이나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등 각국 각 도시들의 랜드마크들을 배경으로 현장감을 불어넣는 영화들이 하나.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랜드마크나 구체적 장소에 집중하는 대신 여행지 그 공간의 정서를 하나로 정의해 그 뉘앙스 하나로 밀고 나가는 영화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를 들 수 있겠지. 물론 그 영화에도 에펠탑이나 베르사유 궁전 다 나오지. 허나 그 영화는 그런 랜드마크들을 예쁘게 포장해 보여주기 보다는, 파리라는 도시의 정체성과 핵심 이미지를 '낭만'으로 잡아 그걸로 여행 뽐뿌 오지게 넣는 영화였다. 그 영화 보고 나면 에펠탑 보고파서 파리에 가고 싶다기 보다는, 그냥 무조건 파리에 가면 어떻게든 낭만적일 것 같아서 가고 싶어지는 거거든. 

<미드나잇 인 파리> 속 파리가 낭만의 도시, <만추> 속 시애틀이 쓸쓸한 도시, <무간도>의 홍콩이 비정한 도시라면, <윤희에게>의 오타루는 그리움의 도시다. 윤희와 쥰, 두 여자는 서로를 그리워한다. 다시 보고파하고, 다시 만나 이야기 나누고파 한다. 하지만 세상의 잣대에 눌린 건지 아니면 스스로의 잣대에 눌린 건지, 둘은 좀처럼 서로를 향해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한다. 그러던 중, 오타루에 살고 있는 쥰이 먼저 편지를 써보낸다, 윤희에게. 물론 쓴 건 쥰이지만, 정작 그걸 한국으로 부친 건 쥰의 고모. 허나 어쨌든 손을 먼저 내민 것은 오타루다. 그래서 오타루는 그리움이 켜켜이 쌓이는 동시에 그 그리움이 눈녹듯 해소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일본 오타루에 사는 쥰의 고모는 매번 말한다. '이 눈이 언제쯤 그칠까?' 한국 예산에 사는 새봄은 윤희에게 또 말한다. '엄마, 우리 눈 많이 오는 곳으로 여행갈까?' 이 영화에서 시종일관 줄기차게 내리는 눈은 윤희의 그리움이다. 그리고 자신의 딸에게 담배를 끊으라 말하며 정작 스스로는 담배를 태우는 윤희의 모습. 윤희는 영화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골목 전봇대 뒤에 숨어서 몰래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윤희가, 이제는 대놓고 담배를 태운다. 맞다. 담배는 윤희의 본질이자 또다른 그리움의 형태다. 윤희는 오타루로 건너온 뒤부터 담배를 솔직하게 피운다. 그리고 쥰은 그녀 고모를 이어받아, '이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라 말한다.

이제 그 둘은 담배를 피울 것이고, 눈은 녹을 것이다. 다시 쌓일지라도. 결국 <윤희에게>는, 그리움이 눈처럼 쌓이고 담배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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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t;윤희에게&gt;</a> (임대형) 그리움이 눈처럼 쌓이고, 담배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영화. &lt;윤희에게&gt;는 퀴어를 소재로 삼은 영화이지만 퀴어 영화 보다는 전통적인 멜로 드라마에 더 가까워 보인다. 두 주인공의 사랑과 그 사랑이 담긴 연애사를, 영화가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기 때문. 그 둘의 사랑과 이별은 오직, 영화가 담지 않은 과거에만 존재한다. 그래서 영화는 짐짓 실체 없이 마냥 우울해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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