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7 18:41

천문 - 하늘에 묻는다 극장전 (신작)


제목이 '천문'이고, 부제가 '하늘에 묻는다'이길래 난 또 천문과학을 둘러싼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꿈과 열정에 대한 이야기일 줄 알았지. 세종대왕과 장영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품었던 꿈과 열정과 사랑 이야기일 거라곤 생각 전혀 못했네.

물론 역사적 사실 다 뒤엎고 퀴어 끼얹어 난장 까는 영화는 아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데리고 장난치면 안 되거든. 하여튼 영화는 그냥 정통 사극인데, 거기에 일종의 멜로 드라마적 해석을 가미 했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멜로 신공을 쏘는 감독의 역량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하고.

퀴어든, 퀴어가 아니든. 멜로 드라마는 관객의 공감을 불러 일으켜야만 하는 장르다. 주인공이 왜 저 상대 주인공과 사랑에 빠졌는지, 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관객에게 철저히 학습시키고 공감시키는 것. 거기서 실패하면 멜로 드라마는 끝나는 거다. 바로 그 점에서, <천문>은 만족스럽다. 장영실이 자신의 은인인 세종을 바라보는 모습, 세종이 자신의 친구인 장영실을 지켜보는 모습. 그 모습들이 영화에 온전히 담겨있고, 두 배우가 혼신의 힘을 다해 잘 연기 해낸다. 실제로 극중 몇몇 장면은 정말 퀴어 영화처럼 보일 정도로 진득하게 느껴진다. 이는 느와르임에도 퀴어 감성으로 두 인물의 관계 묘사를 강화했던 <불한당>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부분. 하여튼 진짜 퀴어 영화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진짜 퀴어 영화가 아니라서 아쉽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허나 퀴어 영화나 멜로 드라마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인물들 간의 심도 깊은 관계 묘사를 영화가 잘 해냈다는 부분.

때문에 영화의 단점은 딱 그 반대 지점에서 드러난다.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가 너무 흥미로운 나머지, 그 둘이 이야기의 변방으로 살짝 내몰리게 되는 순간 영화가 탄력을 잃는다.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허준호의 조말생이 등장하는 지점이다. 배우로서 허준호는 좋은 연기를 보여주지만,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는 영화이다보니 그가 등장하고 이끄는 역모 수사 시퀀스가 좀 처지는 느낌. 물론 후반부에 몰려들 영화의 비극성을 생각해보면 꼭 필요한 장면들이긴 했지만. 

그렇기에, 다시금 세종과 장영실이 만나 서로의 감정을 푸는 후반부가 반대로 또 탄력을 받기도 한다. 특히 세종이 직접 장영실을 심문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두 배우의 호연을 논외로 쳐도 절절하게 와닿는 장면. 거기까지 보면 이 모든 게, 결국 꿈과 사랑 중 하나를 잃어야만 끝나는 이야기인가- 싶어져서 조금 씁쓸해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는 <위플래시>와 <라라랜드>를 통해 비슷한 주제를 보여주었던 데미언 셔젤이 떠오르기도 하는 부분. 세종이 한글 창제를 포기하는 순간, 그의 오랜 벗인 장영실은 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세종이 장영실을 포기하는 순간, 한글 창제라는 그의 오랜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그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또 위했던 둘의 모습이 보여 괜히 마음 한 켠이 아릿했다.

제목이 <천문>임에도 조선 시대의 천문과학 발전사가 깊게 다뤄지지는 않아 다소 아깝다. 허나 세종대왕과 장영실이라는 두 인물 사이의 관계 묘사로도 이미 충만한 작품이니 크게 아쉽지는 않다. 그냥 둘의 관계를 더 암시하는 제목으로 바꿔 개봉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음. 뭐야, 결국 아쉽단 소리잖아

핑백

  • DID U MISS ME ? : 남산의 부장들 2020-02-06 22:12:28 #

    ... 로 보자면야 독재자를 끌어내린 일종의 혁명가이자 실행주의자 맞지. 근데 영화가 또 박정희와 김규평의 관계 묘사를 어떻게 했냐면, &lt;불한당&gt;과 최근의 &lt;천문&gt;이 그랬듯 일종의 브로맨스처럼 해놨거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 내에 둘의 퀴어 로맨스 장면 따위는 없다. 그냥 그 관계 자체가 좀 연인처럼 보인다는 ... more

덧글

  • 로그온티어 2019/12/28 20:05 # 답글

    저라면 [왕과 함께]라고 지었을 겁니다.
    아님 [왕의 학자]라던가요 [천문의 계단]이나

    아니 차라리 [미안하다 등용한다]라고 제목 짓고 중년기에 상의원으로 발탁될 시점을 그릴 겁니다. 명대사는 "사약먹을래 아님 나랑 한양갈래, 상의원 할래 아님 여기서 죽을래!" 이게 되겠군요. 멋지다... 근데 그렇게 되면 뭔가 팬픽같아 지는군요. 역사적인 인물 데리고 BL물 만드는 건 제대로 빻은 일본이나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내가 할 수 있다니 나는 토착왜구였던가...
  • CINEKOON 2020/01/03 16:20 # 답글

    미안하다 등용한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토착왜구시라니 로그온티어님은 앞으로 3대가 잘 드시고 잘 사시겠군요!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