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6 16:48

러시 아워, 1998 대여점 (구작)


곧 <나쁜 녀석들 3> 개봉 하길래 시리즈 정주행이나 다시 해볼까- 하던 찰나, 넷플릭스에서 발견한 이 영화. 성룡과 크리스 터커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니 괜히 다시 보고 싶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쁜 녀석들>이나 이 시리즈나 둘 다 버디 무비라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그 쪽 정주행 다시 하기 전에 이 쪽 정주행 부터 다시 하기로 함. 별 의미 없는 것 같은데?

이소룡은 그야말로 오리지널 그 자체였고, 이후 이연걸이 득세 했으며, 요즘에야 견자단이 먹어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언제나 성룡의 팬이었다. 어릴 때 진지한 정극 스타일의 액션 영화들도 좋아했지만 그럼에도 성룡 특유의 코미디가 가미된 액션 영화들이 더 재밌었거든. 무엇보다 성룡은 어렸던 내가 보기에도 귀염상이었고, 무엇보다 그 액션 스타일이 독보적이었다. 이기기 위해 싸운다는 느낌보다,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 싸우다보니 어느새 이기고 있는 느낌? 스포츠로 따지면 상대의 헛점을 노려 스파이크를 꽂는 냉혹한 공격수라기 보다, 오랜 랠리를 추구해 그 와중 그걸 버티지 못하고 자빠지는 상대를 끝내 이겨버리는 느낌. 

홍콩에서 찍었던 영화들 중에도 그런 영화들이 없었던 게 아니지만, 그럼에도 할리우드로 건너가 찍은 영화들에서 성룡은 유독 말 많은 쌥쌥이 캐릭터들과 진한 파트너쉽을 보여줬다. <상하이 눈>과 <상하이 나이츠> 연작으로 인연을 맺은 오웬 윌슨도 그렇고, <러시 아워> 시리즈의 크리스 터커도 그렇고. 캐릭터를 떠나 오웬 윌슨과의 뭔가 무기력해 매력있는 만담도 근사 했지만, 그럼에도 <러시 아워>의 이 커플이 좀 더 진하게 느껴지기는 한다. 주요 인물 둘이 이끌어가는 버디 무비 형사물인데 둘 중에 백인 남성이 없는 해괴한 광경. 심지어 이게 PC가 하나의 대세로 자리잡은 요즘에서야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는 게 더 놀랍다. 90년대 말에 벌써 이런 영화가 나왔었다니. 어릴 적 볼 때는 그런 생각 한 번도 못해봤는데 꼴에 그 사이 나이 먹었다고 또 이런 게 보이네.

이야기는 존나 심플하다. 미 중국 대사의 딸이 유괴당하고, 평소 그들과 두터운 친분이 있던 성룡의 '리'가 홍콩에서 날아와 수사를 벌이는데 여기에 크리스 터커의 카터가 끼어든다는 내용. 근데 다시 보면 좀 허술한 부분 겁나 많음. 명색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제패한 범죄계의 거물이라는데 고작 어린 애 하나 유괴해 돈 벌 궁리 했다는 게 너무 허접하다. 가오가 안 산다고 해야하나. 게다가 그토록 악명높은 악당이면서 최후는 너무나도 허무하다. 대체 이런 인간이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 그 와중에 캐스팅은 또 톰 윌킨슨이야. 배우의 무게감 때문에 영화에 첫 등장하자마자 '아, 이놈이 흑막이었지'라며 뇌 저편 언저리에서 먼지 쌓여있던 오래된 기억을 꺼낼 수 있었다. 그와는 별개로 톰 윌킨슨 정도 되는 배우가 여기서 허접떼기 악당 연기하고 있으니 그 자체로 좀 웃기기도 하고.

허나 어차피 이런 허접떼기 악당이 중요한 영화가 아닌 것이다. 거물 악당이 어린 꼬맹이 유괴해 돈 벌 생각한다는 그 허술한 설정이 중요한 게 아닌 것이다. 그냥 이 영화는 성룡과 크리스 터커의 만담을 적절히 즐기면 그걸로 족하게 되는 영화다. 성룡이 출연했던 다른 영화들에 비해 시그니처인 아크로바틱 코믹 액션의 함량은 좀 떨어지는 편. 하지만 크리스 터커와의 쿵짝이 의외로 잘 맞는다. 일단 비주얼부터가 새롭잖아, 미국 LA 한복판에서 아시안과 흑인이 함께 뛰어다니는 광경이. 성룡은 다소 어수룩한 모습으로 관객들의 호감을 끌어내고, 크리스 터커는 전매특허 입담과 지나치게 잘춰 조금 괴랄하게 까지 느껴지는 댄스 실력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뺏는다. 둘이 노래 부르면서 춤 추는 장면은 별 것 없는데도 진짜 내 최애.

무엇보다 90년대 특유의 바이브가 느껴져서 더 좋았다. <롱키스 굿나잇> 다시 보면서도 느꼈던 건데, 이 시기 액션 영화들은 진짜 어떤 인장 같은 것이 있다니까. 티격태격 콤비 플레이에, 등 바로 뒤에서 터진 폭발에 의해 나뒹구는 주인공들. 여기에 슬로우 모션은 적절히 깔아주는 게 또 인지상정이고. 아-, 나는 태생이 90년대 사람이라 이런 종류의 감성이 느껴지는 영화들 보면 괜히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몽글몽글 해지더라. 요즘의 젊은 관객들이 보면 분명 촌스럽다고 느낄 연출들일텐데, 괜히 나는 이런 게 좋아. 때문에 사실 영화적으로만 보자면야 그렇게 좋은 영화가 아니겠지만, 성룡에 대한 팬심과 90년대 전형적이고 촌스러웠던 액션 영화들에 대한 팬심으로 좀 더 보정받은 영화.

하여튼 오랜만에 재밌게 보긴 했는데, 여전히 제목이 왜 '러시 아워'인 줄은 1도 모르겠음. 아, 여기서 악당 조직의 행동대장으로 나오는 양반. 어디서 봤나 했더니 브렛 라트너의 <엑스맨 - 최후의 전쟁>에서 복어로 나왔던 양반이더라. 인상이 세서 안 잊혀지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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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20/01/06 17:04 # 답글

    저도 8살 때 데이빗핀쳐 감독의 세븐과 가위란 한국 공포영화를 봤습니다. 엄마 손에 이끌려 쇼킹아시아를 봤던 기억도 나는 군요. 어머니가 영화광이라서요. 텍사스전기톱살인사건2도 초2학년때 보았죠
    ...어린시절부터 지구의 음지를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군요. 좋은 추억들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 CINEKOON 2020/01/06 17:08 #

    어머님께서 대마왕이시군요. 물론 좋은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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