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7 15:48

배드 타임즈 - 엘 로얄에서 생긴 일, 2018 대여점 (구작)


추천받고도 그렇게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다가 이제서야 보게된 영화. 변명같지만 그동안 보기 싫어서 차일피일 미뤘던 건 아니었다. 감독의 전작인 <케빈 인 더 우즈>를 재밌게 봤었기 때문에 언젠가 한 번은 봐야겠다- 싶었음. 다만 그런 식으로 '봐야겠다'라 마음 먹고 대기표 발부한 영화들이 한 두 편이 아니라서... 하여튼 드디어 보게된 이 영화에 대한 짧은 소감은...... 이거 왜 이제 봤지? 추천해주신 분 감사드립니다


배드 스포일러!


제목 그대로, 영화는 '엘 로얄'이라는 모텔에서 진행된다. 캘리포니아 주와 네바다 주의 경계 위에 지어진 엘 로얄 모텔. 미국의 모텔답게 시내가 아니라 다소 외진 곳에 위치해 있는 이 곳에, 각기 다른 성격과 목적을 지닌 이들이 모여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아무래도 제임스 맨골드의 <아이덴티티>와 타란티노의 <헤이트풀 8>일 것. 물론 그 외에도 이렇게 외진 공간 안에서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그려내는 영화가 적지 않았으니 뭐 생각해보면 더 많겠다. 허나 내용적인 측면과는 다르게, 다루고 있는 시대상이나 주제에 있어서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와 더 비슷한 영화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물론 제작 시기상으론 이 쪽이 좀 더 빠르지만. 

<헤이트풀 8>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언급했는데, 드류 고다드의 평소 스타일 보다 훨씬 더 타란티노스러운 구성을 띈 영화다. 대화와 상황으로 만들어내는 캐릭터 코미디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공간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크게 보면 챕터 구성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공통점. 그 중에서도 상술했던 것처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와 더 많은 공통점을 이 영화가 갖는 이유는, 영화가 베트남전 당시의 시기와 히피 문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의 초반부에, 이미 영화가 모텔 카운터 위 TV 화면을 통해 강조를 해준다. TV 뉴스 안에서는 베트남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닉슨의 얼굴이 등장하며, 찰스 맨슨과 그의 일당들을 연상케하는 살인 사건이 언급된다. 이 짧은 TV 뉴스 화면이 꽤 많은 정보를 깔아주는데,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당시 상황을 확실히 언급해주기 때문에 이후 상황에 대해서 따로 별다른 설명을 안 해준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대체 무슨 변태 모텔이길래 각 호실을 몰래 감시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둔 거지? 그리고 남이 섹스하는 걸 왜 카메라로 찍으려 하지? 그걸 주도하고 있는 모텔의 보스들은 대체 누구야? 여기에 갑자기 끼어든 FBI 요원은 여기 왜 왔으며, 빌리 리라는 이 허우대 멀쩡한 놈은 왜 이렇게 비틀 거리는겨. 이런 거 싹 다 설명 안 해줌.

근데 앞서 말했듯, 어차피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알면 굳이 따로 설명 안 들어도 다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다. 베트남전을 지휘했던 닉슨에 대한 뒷이야기는 이미 <더 포스트>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고, 닉슨이 감청 매니아였던 사실과 워터게이트 사건 또한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을 통해 대충 알잖아. 그 당시가 대충 이렇게 돌아가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굳이 영화가 발벗고 나서 모텔 보스들의 얼굴과 이 모텔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구구절절 다 설명해주지 않아도 대충 그렇겠구나- 하며 넘어가게 된다. FBI 요원의 존재도 그런 식이고, 빌리 리에 대한 설명도 비슷하다. 특히 빌리 리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직부감 두 번의 수혜를 받은 자다. 직부감은 보통 운명론적인 관점이나 전지전능함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연출이니, 아예 등장부터 '교주'라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는 셈.

이야기의 전개 면에서 굉장히 훌륭하다. 물론 완벽한 영화는 아니라서 중간 중간에 리듬이 파열되는 부분도 있고, 중반부까지 잘 쌓아올린 미스테리와 스릴을 후반부에 마구잡이로 풀어냄으로써 망가지는 부분도 있다. 허나 어쨌든 초반부 모텔의 비밀이 드러나는 장면에서의 몰입감은 엄청나더라. <기생충>의 그 장면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거의 비슷한 종류의 스릴과 공포였다. 그나저나 드류 고다드 이 양반은 <케빈 인 더 우즈>에서도 그렇고 어릴 때 거울 뒷편에서 뭘 보기라도 했던 것일까? 누군가가 몰래 지켜보고 있는 외딴 집 컨셉 엄청 좋아하네.

허나 이 영화가 진정으로 내 마음에 들었던 건, 주제 의식 때문이었다. 영화는 드니 빌뇌브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경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엘 로얄은 캘리포니아 주와 네바다 주를 긋는 빨간 경계선 바로 위에 지어졌고, 그 때문에 카운터 직원은 고객들에게 캘리포니아에서 주무실 것인지 네바다에서 주무실 것인지에 대해 장황한 브리핑을 이어간다. 근데, 당시 시대가 그랬지. 월남전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애초 그 당시의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공존 혹은 대립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 아니었나. 빌리 리도 자신의 집회에서 말하지 않나. 체제와 그를 따르는 인간들이 우리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끔 강요한다고. 신과 무신론, 옳음과 그름, 선과 악. 그들은 우리에게 그걸 강요하지만, 우리는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를 쟁취해 내야 한다고. 참으로 히피스러운 연설이지만, 어쨌거나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웃긴 게, 영화의 결말부에 들어서는 빌리 리 마저도 남들에게 둘 중 하나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거부하라던 본인 말에 위배되게, 정작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빨강 아니면 검정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강요한다. 그리고 둘 중 그 무엇도 선택하길 거부한 이에게 그가 선사한 건, 상대의 머리를 관통하는 총알 뿐.

영화는 그 모든 걸 강요한 가해자와 그 모든 걸 거부하며 속박으로부터 탈주하길 원했던 자들, 그리고 그 모든 걸 받아들일 수 밖에 없어 결국 피해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된다. 제프 브리지스가 연기한 신부 캐릭터는 기성 세대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은행 강도였다. 체포되어서 10여년 간 복역도 했다. 그는 분명 잘못을 저질렀다. 허나 우리의 벨보이 마일스 밀러는 무얼 잘 못 했나. 그는 베트남 참전 용사로 이미 PTSD를 앓는 중이었다. 기성 세대들이 강요한 전쟁에 억지로 참여해, 결국 진짜 피해자가 된 사내였던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기성 세대, 그 전쟁과 그 기성 세대에 휘둘리지 않으려 하며 자신들만의 세상을 세운 영 제너레이션.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실제 전쟁의 한 가운데에 내몰렸던 젊은이. 영화의 후반부, 전자의 둘이 피터지게 싸울 때 결국 선택을 내리는 건 피해자였던 젊은이고, 그 역시도 죽을 때 고해의 대상이 되어주는 건 기성 세대다. 그래서 영화가 좋았다. 마치 <설국열차>의 마지막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실수를 저지른 어른이 다음 세대의 젊은이에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결말. 전쟁을 일으켰던 어른이 전쟁에 나간 젊은이를 영혼으로 보듬는 영화. 비록 그가 실제 신부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짜 신부의 진짜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의 주제 의식과 이 정도의 장르적 쾌감이라면, 월남전에 관한 가장 일촉즉발의 코멘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덧글

  • 로그온티어 2020/01/17 18:53 # 답글

    드디어 보셨군요! 저는 경계를 맥거핀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여기에 이런 해석을 가할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 리뷰를 읽으면서, 그간의 경험과는 다른 경험을 느꼈어요. 제가 보지 못한 다른 영역을 볼 수 있다는 건 정말로 좋은 것 같아요.

    시네쿤님이 [설국열차]를 떠올리신 것과 다르게, 저는 이 영화에서 [서스페리아] 리메이크와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 영화에서 마지막은 역사속에 사라진 피해자들을 위로한다는 의미로 느껴져서 아름답고 격렬한 슬픔을 느꼈거든요. 이 작품에서서 마지막 고해성사 씬은 베트남 참전 이후 사회적인 편견에서나 개인적인 PTSD로 인해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을 영화가 위로해준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CINEKOON 2020/01/30 00:52 #

    아직 <서스페리아>를 보지 못해 (그리고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 같아)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로써도 꽤 적절한 장면이라고 느꼈어요. 전쟁을 일으킨 세대가 그 전쟁에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세대에게 일종의 영적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는 느낌이어서...
  • 로그온티어 2020/01/30 01:43 #

    안 보셨다고요? ...음...

    http://series.naver.com/search/search.nhn?t=all&fs=novel&q=%EC%84%9C%EC%8A%A4%ED%8E%98%EB%A6%AC%EC%95%84

    네이버가 유혹하고 있습니다...
  • CINEKOON 2020/02/06 22:52 #

    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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