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 머릿속으로 천천히 떠올려 보자. 주인공이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속한 곳에서 출세 하려 하고, 그를 위해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 일종의 외근을 하게 된다. 처음엔 빨리 해치우고 뜨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일을 하면서 그 곳 사람들과 감정적 교류를 갖게 되고 그 일에 있어 자부심을 갖게 된다. 허나 원 근무지에서는 이제 그를 배제하려 하고, 그를 통해 주인공의 본래 실체를 알게 된 외근지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실망감을 표하며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한다. 이에 죄의식과 책임감을 느낀 주인공이, 원 근무지를 엿먹이면서도 외근지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내용.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심지어는 중간 중간 이야기의 변곡점들까지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예상되는 코미디다. 그런 식의 대사도 나오겠지, '우리 이용한 거였어요?' 식으로 주인공에게 실망감을 표하는 대사.
때문에 결코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에서 전개보다 장르적으로 코미디의 함량을 얼마나 때려놓고 채웠을까-에 좀 더 관심이 갔던 영화다. 사실, 탈을 뒤집어쓰고 시치미 뚝 뗀채 동물 코스프레를 한다는 설정 자체는 너무 말이 안 되지 않나. 영화 내에서 그에 대해 주인공이 이 악물고 변명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어쨌거나 썩 말이 되는 그림은 아닌 거잖아. 다만 장르가 다른 것도 아니고 코미디니까, 그 부분의 허술한 설정들도 어느 정도 눈 감아 줄 수 있는 것. 오로지 웃기기만 한다면.
다행인 건 이 영화의 감독이 손재곤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달콤, 살벌한 연인>과 <이층의 악당>을 만들었던 사람이다. 그 두 영화는 굉장한 코미디 감각을 갖고 있던 영화였고, 아이디어와 전개 면에 있어서도 <해치지않아>만큼 뻔한 영화를 만든 적도 없던 사람이라니까. 근데 오랜만에 들고온 영화가 이런 영화이니, 뻔한 전개 대신에 뭔가 새로운 코미디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거지.
일단 새로운 코미디라는 것은 별로 없는 영화다. 웃음을 유발하는 대부분의 장면들마저 죄다 어디서 본 것만 같다. 문제는 그 타율과 파괴력이다. 코미디마저 뻔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약하지 않다. 동물을 주 소재로 삼은 영화이다보니 내내 사랑스러운 터치가 깃들어 있는 영화인데, 바로 그걸 밑바탕으로 깔고 코미디를 전개하니 딱 명절용 가족 코미디를 기대하고 볼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잘 먹혀들어가는 것이다. 대표적인 건 편의점 터는 고릴라 장면 같은 거. 말도 안 되는 장면이지만 특유의 분위기로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데, 여기에 하나둘씩 쌓았던 코미디를 일순간 터뜨리는 방식도 효과적이다. 고릴라가 CCTV 들고 나가는 모습에서 안 웃을 관객은 별로 없을 거라고 본다.
이 영화가 잘한 점은, 코미디로써 장르적 쾌감을 어느 정도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주제의식이 담긴 메시지도 잘 던져냈다는 것. 동물들과 동물원을 주 소재로 삼은 작품답게, 영화는 동물 권리 또는 동물 복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동물원 시설을 아무리 잘 갖추어 놓는다해도 결국 그들이 본래 살던 야생 환경에 비할 바는 아닌 거잖나. 동물 입장에서는 동물원도 감옥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동물들의 입장을, 영화가 잘 보여준다. 비록 북극곰 탈을 쓰곤 있었지만, 한 마리의 동물,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 곳에 갇혀 구경 당하는 기분. 영화는 그걸 잘 전달하고 있고, 동물원이라는 필요악적인 존재에 대해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던진 화두와 주제 의식에 비해, 영화가 명쾌하고 아름다운 답을 내놨다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 나 역시도 동물원이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아무리 나쁘다 생각해도 결국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 것이라는 입장인데 영화가 딱 그런 결말을 낸다. 그러다보니 무거운 화두를 던져놓고 결말에 와서 안전하게 수습하는 꼴이 다른 이들에겐 못마땅하게 비춰질 수도 있겠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허나, 상업 장르 영화로써 이 정도면 할 건 다 했다고 본다. 상업 장르 영화가 내놓아야 할 것 1순위는 재미다. 물론 메시지와 주제 역시 1위로 동등할 수 있지. 그러나 결론까지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영화를 다 보고 극장 밖으로 나서는 관객들에게, 그러한 주제는 금세 휘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아닐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지 않나. 상업 장르 영화가 결론과 우리가 가야할 길까지 제시한다면 더할나위없이 좋겠지만, 딱 이 정도의 화두를 던진 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성과라고 생각한다. 뭘 그런 마지막 정답까지 제시하길 바라냐, 어차피 그건 다 우리 인간들이 생각해야할 문제인데. 영화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만이여도 괜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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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스 알리미 2020/01/22 08:05 #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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