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전반에 흐르는 건 다름아닌 유럽풍 스릴러의 기운이다. 가장 많이 떠오른 영화는 <타인의 삶>. 몰래 도청하는 장면이 많이 나와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구체적으로 비슷한 설정과 장면 등을 제외하고 보아도 조명이나 카메라의 움직임에 좀 더 많이 의지해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를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더 크게 느껴진다. 뭐랄까, 일반적인 충무로 스릴러나 할리우드 스릴러들에 비해 좀 더 표현주의적인 느낌이랄까. 더불어, 장르적으로 아주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유럽풍 에스피오나지 장르의 쓸쓸한 정서도 곳곳에 깃들어 있는 영화다. 그 부분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였고.
보수나 진보를 떠나 철저히 중립적인 시각에서 연출하려고 노력했다는 뉘앙스의 감독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사람들마다 생각이야 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걸 꽤 잘 해낸 것처럼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 묘사도 그렇다. 어떤 때에 보면 존나 비열하고 치사한데, 또 굳이 따지고 보면 뭔가 확실히 강단 있어 보이기도 하고. 꼴에 대통령이라고 또 자기가 낮에 갈군 부하 직원 달래주려고 술 사들고 야밤에 찾아오는 행각을 보고 있자니 사람 사는 곳 일반 회사나 청와대나 다 비슷하구나-라는 생각도 좀 들고. 게다가 담당 배우가 이성민이야. 순간 <미생>의 한 장면인 줄.
하여튼 박정희 대통령 묘사도 그렇지만 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주인공 김규평 역시 중립적으로 보이는 복합적 인물이다. 자기 입으로 말했듯 대국적으로 보자면야 독재자를 끌어내린 일종의 혁명가이자 실행주의자 맞지. 근데 영화가 또 박정희와 김규평의 관계 묘사를 어떻게 했냐면, <불한당>과 최근의 <천문>이 그랬듯 일종의 브로맨스처럼 해놨거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 내에 둘의 퀴어 로맨스 장면 따위는 없다. 그냥 그 관계 자체가 좀 연인처럼 보인다는 것. 어쨌거나 영화의 묘사가 그러하다 보니, 김규평이 대통령을 죽인 이유가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왠지 바람난 연인에게 피의 복수를 감행하는 옛 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편하게 말하면 왜인지 좀 찌질해보인다는 말임. 물론 그게 이해가 안 가는 찌질함인 것은 또 아니지만.
근데 그런 설정이 그냥 정치적으로 중립 기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거나 흥행을 위해 브로맨스를 가미한 것처럼만 보이지는 않는다, 또. 그러니까 이 연인 같은 관계 묘사가 어떻게 느껴지냐면, 좀 사사롭게 느껴지거든. 물론 사랑하는 사이에서 생기는 사사로운 감정들은 중요하다. 허나 여긴 청와대고 상대는 대통령 아닌가. 다른 곳 다른 관계도 아니고 여기서 사사로운 감정들이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사로운 감정들 때문에 한 나라의 운명이 뒤바뀌는 이야기 구조. 이게 썩 재미있다. 왕이든 대통령이든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일진대, 이들의 운명이 한 순간에 바뀌는 데에는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들이 관여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역사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나 독재자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 때문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저 새끼가 나보다 내 옆에 있는 이 새끼를 더 예뻐하네?'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시각이 재미있다.
영화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하기 전 몇 달 간의 이야기를 능숙하게 펼쳐낸다. 배우들의 연기야 말할 것도 없고, <마약왕>으로 잠시 삐끗한 것처럼 보였던 우민호 감독의 연출 역시 꽤 괜찮다. 그 좋은 점들 중에서도 이 영화가 내 마음에 가장 깊숙이 들어온 순간은 결국 그 결말이었다. 영화의 결말이 존나 허무하다. 그게 나라를 위한 대국적이고 거국적인 마음 때문이었든, 아니면 그저 사사로운 질투의 결과물이었든 간에 어쨌거나 한 나라의 대통령이 죽은 거잖나. 한 나라의 독재자가 죽은 거잖나. 그럼 최소한 다음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은 조금이라도 달라져야재. 달랐어야지. 허나 그 자리를 차지한 건 그저 이름만 바뀐 또다른 독재자였을 뿐.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결말부 대통령의 자리를 지그시 바라보는 전 장군의 쥐새끼 같은 이미지는 다른 차원의 절망과 탄식을 불러온다. 맞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허무주의의 연속이었다. 물론 독재 정권 시기나 민주화 운동 시기를 겪은 게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뿐만은 아니다. 그러나 유독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허무하게 느껴진다. 박정희 다음 얼굴이 전두환이었던 데에서. 전두환 다음 얼굴이 노태우였던 데에서. 영화가 그 허무함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 괜시리 내 마음이 허해졌다. 이쯤되면, 사사로운 감정들과 허무주의로 빚어낸 유럽풍 스릴러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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