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6 22:45

남자사용설명서, 2012 대여점 (구작)


키치. 보통 저속한 작품 내지는 표현, 묘사를 이르는 말. 굳이 상스러운 말로 표현하자면 싼티나는 작품에 '키치하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키치'라는 개념은 현대에 와서 '병맛'이라는 개념과 자주 혼용 되기도 하는데, 사실상 현재의 한국에서 '키치'는 곧 '병맛'이다. 그리고 그 키치와 병맛을 있는대로 꽁꽁 뭉쳐 영화로 연성시키면 바로 이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상 포스터부터도 싼티 날티 나는 비디오용 영화처럼 보이는데, 정작 이 영화의 흥행 실패는 이 포스터 때문이었다고 본다. 이거 존나 재밌고 좋은 영화인데 저 싸구려 학예회 같은 포스터가 다 망쳤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나 DC 확장 유니버스 보다도 더 비현실적이고 괴상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정세가 수퍼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이상한 세계관. 물론 <동백꽃 필 무렵>이나 <스토브리그>에서의 이미지 때문에 요즈음 오정세는 멋져보인다. 작품을 떠나서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좋은 배우고. 하지만 원빈이나 정우성이 떠오를 만큼 잘생긴 배우는 아니지않나. 그를 보고 또 싸인 받기 위해 팬들이 소속사 앞에 줄 서서 진을 치고 있을 정도는 아니지않나. 이병헌이나 하정우 같은 수퍼스타는 아니지 않냐고! 근데 이 영화에서는 수퍼스타로 나온다. 그것도 괴이한 몰골과 헤어 스타일로. 이쯤 되면 영화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이시영이 연기하는 최보나이다. '여성 서사'라는 표현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이기는 한데, 어쨌거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을 요긴하게 잘 써먹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직장인 여성이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온갖 차별적인 시선들과 대우. 상대 남자를 좀만 친절하게 잘 대해줘도 성희롱이나 추문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리는 여성의 입지. 영화는 주인공을 통해 그걸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같은 내용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구구절절 읊어대고만 있었다면 재미도 없을 뿐더러 역효과까지 초래 했을 텐데, 영화는 적재적소에 그런 묘사를 빵 때려주고는 입을 싹 닫는다. 핵심 메시지를 충분히 던지면서도 쿨하게 진행하는 여유. 영화의 그런 페이스가 아주 좋다.

캐릭터 코미디와 상황 코미디에 둘 다 능한 영화이기도 하다. 일단 오정세가 연기한 이승재 캐릭터를 너무 잘 잡아놨다. 그러하다보니 이 남자가 뭘해도 웃긴다. 초반부의 유두 젖꼭지 드립은 물론이고 찌질함의 끝판왕인 '잤지?' 콤보까지. 배우와 캐릭터가 찰떡같이 붙어버린 경우. 그리고 상황 코미디. 이미 캐릭터를 잘 잡아놓은 상태이니, 이후로 뭔 상황을 쌓든 대부분 다 터진다. 특히 리조트 객실에서 시작해 누드 드라이브로 이어지는 시퀀스는 그야말로 환상. 

앞서 키치함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가득 차다 못해 병맛이 끓어 넘치는 수준. 이건 박영규가 또 한 몫한다. 차분히 읊는 박영규의 대사 톤과 사전 제작된 그의 비디오 영상들의 조화가 쩐다. 일부러 못 만든 비디오 아트 같은 느낌. 여기에 강아지의 불알에서 환하게 빛나는 파란빛이나 허접스런 영화 내 광고 퀄리티 등이 그 친숙하고 재미난 저급함에 더해진다. 이시영과 오정세 뿐만 아니라 꽉 찬 주조연진의 깨알같은 연기들 역시 보는 맛이 있음. 배성우의 '개새끼야' 멘트도 좋고 이원종의 'B 마이너~'도 좋고. 아, 계속 줄줄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거 진짜 존나 재밌는 영화라니까!

개봉 당시 극장에서 처음 보고 그 이후로도 다시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이 정도로 키치한 명작 찾기 쉽지 않다. 부러 병맛 같은 느낌을 좋아한다면 충분히 괜찮을 작품. 키치 미 이프 유 캔. 마지막은 그 유명한 오정세의 인터뷰 짤로 마무리하면 금상첨화룡점정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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