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7 13:21

버즈 오브 프레이 - 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 극장전 (신작)


시리즈의 통일성을 중시하는 내 입장에서, DC는 정말이지 계륵 같은 존재다. 아메리칸 코믹스에 심취해 있었던 어린 날, 내게는 언제나 마블보단 DC였었지. 허나 마블이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동안, DC가 했던 건 헛발질에 헛손질들 뿐이었지 않은가. 진짜 짜증나는 건 아예 아무 것도 안 한 것은 또 아니라는 거다. 영화 내적으로는 시리즈를 벌리긴 오지게 벌려놨고, 영화 외적으로는 굳이 안 해도 되었을 말들을 연속적으로 내뱉으며 실언이 무엇인지를 증명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데이비드 에이어의 'FUCK MARVEL' 발언 같은 것들. 갑자기 그 말 떠오르네. 언젠가 이경규가 말했지,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고. DC가 딱 그 꼴이잖아. 하여튼 좋아하기는 마블보다 더 좋아했었는데, 실사 영화 시리즈로써는 빵점이잖아. 영화의 퀄리티도 들쭉날쭉이지, 설정들도 닥치는대로 바꾸지, 거기다 캐스팅에 일관성마저 없으니. 

그 때문인지 이 영화에 거는 기대 역시 별로 없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퀄리티는 나빴지만 마고 로비의 할리 퀸은 살아남지 않았느냐고? 아니, 난 할리 퀸 역시 그저 그랬다고 생각한다. 물론 마고 로비와의 싱크로율이나 메이크업 컨셉은 좋지. 근데 캐릭터와 그 능력 설정이 괴이했다고. 하여튼 마고 로비의 할리 퀸에 대한 기대도 없지, 그리고 조커도 아니고 그녀를 중심으로 한 스핀오프를 기획한다? 이것도 이상한 기획이지. 여기에 개봉 직전 보게된 메인 예고편이 결정적이었다. 예고편이 그 정도로 재미없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거든. 그런데 존나 웃기게도, 정작 실제로는 재미있게 봤다. 뭐, 그렇다고 해서 엄청 좋게 본 건 아니다. 그러나 보는내내 크게 걸리는 부분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마블과는 다르게 감독 개인이 자신의 인장을 영화 안에 세게 박으려는 노력이 온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영화가 좀 좋아보였다고 해야하나.

요약하면 꼬맹이 하나가 똥 싸는 걸 밤새 기다리는 이야기. 그것부터가 존나 어이가 털려서 좋다. <저스티스 리그>처럼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수어사이드 스쿼드>처럼 하드코어 미션에 징집되는 이야기도 아닌 그저 꼬맹이 관장털이. 어차피 조커처럼 마스터 마인드도 아니고, 어차피 둠스데이처럼 막가파 힘뚱땡이도 아니라면 딱 이 정도의 소소한 스토리라인이 더 알맞은 것처럼 보인다. 

전개는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쿠엔틴 타란티노의 그것에 <데드풀> 느낌 조금 첨가해 양념한 느낌.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는 할리 퀸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고, 플롯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다. 여기서 생기는 일차원적인 단점. 어쩔 수 없이 전개가 난해하고 정신없어 보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게 재밌었다. 놀란과 타란티노의 플롯 뒤섞는 방식을 내가 좀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영화의 오프닝부터 키치한 느낌이 가득해 전적으로 내 취향이었음. 키치한 기운으로 줄줄이 엮은 콜라주 같은 느낌이랄까. 물론 내레이션은 좀 덜어내면 좋았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았다. 하여튼 케빈 파이기가 모든 걸 관리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전반적으로 안정적이지만 각 감독과 작가들의 개성이 옅은 반면, <버즈 오브 프레이>는 좀 막가파스럽지만 감독이 무언가를 해내려고 했다라는 그 점을 높이 산다. 

다만 액션에서의 아쉬움이 크다. 일단 나름의 팀업 무비인 건데, 그 부분에서는 사실상 완패. 각자 활동할 때는 그럭저럭이었지만, 모든 캐릭터들이 모여 싸움 한 판 벌일 때가 오면 그 아쉬움이 짙어진다. 일단 전체 캐릭터들의 액션 합도 제대로 설계되어 있지 않은 인상이고, 그걸 카메라에 담는 방식도 심히 어색함. 다들 줘터지게 싸우고 있는데 카메라가 왜 이렇게 멀리서 잡는 거냐. 몰입 안 되게. 하여튼 축구팀이라면 팀플레이는 커녕 그라운드에서 각자 개인기만 오지게 돌리고 있는 느낌임. 더불어 '여성 팀업 영화'로 대차게 홍보 했으면 적어도 '여성'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액션 하나쯤은 넣어줬어야 하는 게 맞지 않냐? 아, 당연히 남성 캐릭터들이 이들에게 줘터지기는 한다. 내 말은,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액션도 좀 있었어야 한다고 보는 거지. '남자도 할 수 있는데 여자라고 못할쏘냐' 식의 액션 컨셉도 좋지만, 더불어 '여성들만 할 수 있는 액션' 역시 같이 존재했으면 어땠을까- 싶음. 그래도 <원더우먼>이나 <캡틴 마블>,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점점 여성 중심 수퍼 히어로 영화들이 나오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이완 맥그리거의 블랙 마스크는 진짜 옘병이다. 이완 맥그리거야 내가 좋아하는 배우고 나의 영원한 오비완 케노비지. 배우의 연기력을 떠나서 일단 캐릭터 설정과 허무한 최후가 진짜 병신 같다. 블랙 마스크 정도면 조커나 펭귄 같은 일류 네임드에 비해서는 좀 모자라지만, 그래도 충분히 매력적인 고담 시의 빌런 아닌가. 일류 네임드는 아니더라도 나름 네임드는 된다고. 근데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 그럼 나중에 나올 다른 영화들엔 당연히 못 나오는 거잖아. 그 신분을 계승하는 컨셉이 아니라면 말이지. 뭐, 이런 점은 마블에서도 줄곧 저질렀던 실책이니 크게 개의치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와는 별개로 일단 블랙 마스크 캐릭터가 너무 재미없음. 카리스마도 없음. 카리스마 있어보이고 무서워보이려고 발악하는 짠내 캐릭터처럼 밖에 안 보임. 아, 빅터 재즈도 나온다. 근데 얘도 병신 같기로는 별반 다를 것 없어서.

세부적인 부분에서의 개연성도 많이 떨어진다. 아무리 주인공이고 체술에 능한 할리 퀸이라지만, 얘가 비살상무기 하나 들고 고담의 경찰서를 턴다고? 할리 퀸에 경찰서를 태워? 씨바, 이게 말이 되냐. 수퍼 파워 하나 없는 일반인 빌런에게 경찰서 전체가 털리고 또 살상무기 손에 가득 쥔 용병들마저 GG를 쳐?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싶어진다. 초능력이 없는 캐릭터는 주인공 보정 + 파워 인플레이션 콤보로 고담 전역을 쌈싸먹는데, 정작 초능력을 보유한 블랙 카나리는 쩌리 아닌 쩌리가 되어버렸다. 음파 그렇게 한 방 쓰고 끝내는 건 좀 아니지 않았나. 그것도 굉장히 촌스러운 CG 감각으로 만들어낸 초능력이던데.

제일 아쉬운 건 헌트리스다. 일단 캐릭터의 설정부터 막 붙인 티가 나는데, 막판 전투에 참여하고 할리 퀸을 돕는 동기도 뚜렷하지 않아 더욱 더 의아함. 르네 몬토야나 블랙 카나리는 짐짓 이해가 돼. 근데 헌트리스는 왜 참전해 목숨 바쳐 싸우는 거냐고. 비중도 생각보다 너무 적고. 말이 '버즈 오브 프레이'지, 그냥 할리 퀸 단독 무비에 여러 사이드킥 세팅한 걸로 밖에 안 보인다. 그게 컨셉인데?

전체적으로 훌륭한 영화는 아닌 것이 사실이다. 허나 그럼에도 어느 정도 중간은 가는 영화라 생각한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나 <저스티스 리그>, <샤잠!> 같은 영화들보다는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인상. 여전히 중구난방에 말도 안 되는 부분 투성이고 몇몇 중요 캐릭터들은 허무하게 묘사해낸 괴작 아닌 괴작이지만, 그럼에도 감독 고유의 스타일로 무언가를 해보려했다는 노력에만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 마고 로비. 헌트리스나 블랙 카나리나 여러 캐릭터들이 나오지만 결국 이 영화는 마고 로비의 원 우먼 쇼다. 마고 로비 연기하고 있는 거 보면, 진짜로 이 캐릭터를 연기하는 걸 즐기고 있다는 게 느껴져 새삼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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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DNE 2020/02/07 17:20 # 삭제 답글

    아쿠아맨도 그렇고 워너 DC는 각 감독의 개성, 비전 특색을 어느정도 보장해주는 것 같아요. 마블 MCU는 말씀하신것처럼 묘하게 평준화되어 나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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