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9 20:52

조조 래빗 극장전 (신작)


인종, 성별, 종교, 국가, 장애, 성적 지향성 등을 놓고 갖가지 차별과 폭력이 벌어지는 작금의 세태. 그런 혐오의 시대에 히틀러를 외치는 이 영화는 그야말로 타이카 와이티티가 히틀러에게 날리는 빅엿이다. 아리아 순혈주의에 찌들어 있던 인간을 연기하는 게 마오리족 혼혈의 뉴질랜드 남자라니. 그 캐스팅부터가 히틀러 엿 멕인 거지.

<문라이즈 킹덤>과 <인생은 아름다워>를 칵테일 마냥 섞어놓은 영화다. 초반부는 정말이지 깨발랄하다. <문라이즈 킹덤>뿐만 아니라 다른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이 연이어 떠오를 정도로 동화적인 색감과 발랄한 연출이 잘 살아있다. 귀여운 아이들이 어른들 사이로 숲과 들을 뛰놀며 벌이는 작은 소동들. 근데 그 아이들이 나치즘 광신도라는 게 동화라기엔 존나 웃기고 무섭다.

영화를 본 사람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쪽의 입장은 '이 정도로 귀여우면 됐지, 뭐' 정도인 것 같고, 반대쪽의 입장은 '암만 주인공이 아이라도 그렇지, 너무 전쟁을 밝고 귀엽게 그린 것 아니냐'는 이야기라고 들었다. 만약 내가 굳이 어느 한 쪽 편을 들어야 한다면, 충분히 전자 쪽의 편에 설 수 있을 것 같다. 안다. 전쟁은 참혹하고 비참 하다는 것. 그런 소재를 다룰 수록, 특히 실제 이야기에 기반한 소재일수록 신중하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겠지. 허나 냉정히 따지자면, 그런 영화들이 전무한 게 아니지 않은가. 이미 전쟁을 무겁고 차갑게 그린 영화들이 쎄고 쎘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영화 하나 정도는 나와도 괜찮지 않을까? 그것도 아예 전쟁 찬양이나 전쟁 미화하는 영화면 또 몰라. 근데 그런 것도 아니잖나. 전쟁이라는 것 자체를 냉철하게 따지고 뜯는 영화이지만, 그 표현 면에서 귀여운 거잖나. 

나치의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 영화는 그걸 살짝 건드린다. 과거 우리나라가 반공 정책을 펼치며 '북한군은 늑대처럼 생겼고 머리에 뿔도 있대'라고 가르쳤던 것처럼, 독일군은 유대인들이 박쥐처럼 크고 흉측한 날개와 뿔이 달렸으며 돈에 환장하는 사치스런 족속들이라 표현한다. 우리의 주인공 조조도 그걸 믿는다. 허나 조조가 다락방에서 유대인 엘사를 발견하였을 때, 그녀의 머리에 달려 있는 것은 뿔이 아니었다. 어깨에 날개라곤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밝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조조의 마음을 밝혔고 예술을 밝혔다. 유대인은 괴물이 아니었다.

포인트는 나치 독일 역시도 전쟁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그 혐오의 대상을 바꿔갔다는 것이다. 유대인 혐오는 미군 혐오가 되었고, 이내 소련군에 대한 혐오로 번지게 되었다. 결국 혐오의 대상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게 유대인이든, 미군이든, 소련군이든. 일반 사람들이 느끼는 실재적인 혐오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국가와 체제가 만드는 프로파간다. <조조 래빗>은 들불처럼 번지는 그 혐오의 프로파간다를 요모조모 귀엽게 따져간다.

그래서 그 프로파간다의 가장 꼭대기에 있었던 사람이, 마오리족 혼혈 뉴질랜드 남자의 얼굴을 하고 조조의 앞에 나타날 땐 결국 실소할 수 밖에 없다. 이런 피부 색깔을 가진 놈이 아리아 순혈주의를 외친다고? 물론 실제 히틀러가 아닌 조조의 상상 속 히틀러에 불과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또 의미가 있다. 조조는 아리아 순혈주의를 부르짖었고 자신의 이상적인 독일형 얼굴 생김새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정작 자신이 존경하는 히틀러의 모습을 타이카 와이티티의 얼굴로 상상해내었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힘이 세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조조에게 있어 아리아 순혈주의는 그저 잠깐의 허상 뿐이었던 것이다. 

조조를 연기한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그와 붙는 토마신 멕켄지의 싱그러운 얼굴도 눈에 띈다. 허나 결국 이 영화는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로 기억될 만한 영화다. 그녀는 영화 전체를 든든하게 받쳐주며 관객들의 숨통을 틔워주는 동시에, 가장 슬픈 발재간으로 결국 눈물을 이끌어 낸다. <결혼 이야기>에서도 굉장한 연기를 보여줬었는데 거의 동시기에 찍은 이 영화에서 또 이 정도의 연기라니. 스칼렛 요한슨의 퍼포먼스는 지금도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마저도 부족하다 생각한다. 다른 배우들 좀 더 이야기하면, 샘 록웰 특유의 건들거리면서도 무기력한 연기가 좋다. 레벨 윌슨의 넋나간 또라이 연기도 적절하고. 그럼에도 스칼렛 요한슨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요키를 연기한 아치 예이츠의 얼굴이다. 나올 때마다 귀여워서 혼났네. 

타이카 와이티티 연기 역시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다. 캐스팅 자체가 시의적절한데, 히틀러 특유의 연설톤을 따라하면서 까지 굉장한 연기를 보여 준다. 당신 <이글 대 샤크> 볼 때까지만 해도 그저 그랬었는데, 정말이지 도대체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랜 린턴> 찍고 각성 하기라도 한 건가...

내내 싱글벙글 발랄 하다가 갑자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그러면서도 또 귀엽게 갸릉 거리다가 어느새엔가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조조 래빗>에게는 정말이지 이상한 매력이 있다. 제작 자체는 2019년으로 분류되겠지만, 어쨌거나 국내에선 올해 개봉 했으니. 조금 이르게 찾아온, 올해 나의 TOP 후보.

뱀발 - 게슈타포로 나오는 양반 인상이 너무 강해서 어디서 봤지- 싶었었는데 알고보니 <로건>에서 칼리반 연기했던 양반이었네. 너무 큰 키 때문에 순간 더그 존스랑 헷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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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20/02/09 21:50 # 답글

    타이카 와이티티... 뱀파이어 영화 만들 때부터 이 사람 차기작 기대된다고 내심 기대했는데
    크으....
  • dd 2020/02/11 22:12 # 삭제 답글

    영화가 귀여운 와중에 냉혹한 느낌이랄까, 아이한테도 가차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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