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0 15:40

1917 극장전 (신작)


이제 막 2월이 되었을 뿐이지만, 올해 들어 본 영화들 중 가장 시네마틱한 영화로 꼽고 싶다. 그래서 대체 그 '시네마틱한 영화'가 대체 뭔데-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아마 비슷한 영화의 예로 <그래비티>나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1917>은 그야말로 영화적인 영화다. 시나리오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 세 작품 모두 시나리오가 그렇게 두껍지는 않았을 것이다. 텍스트에 크게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이미지 하나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해내는 마법. 이 마법이 바로 영화 아니던가.


열려라, 스포 천국!


촬영이나 조명 같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영화이기에, 그 부분부터 먼저 이야기하는 게 편할지도 모르겠다. 우선적으로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과 같은 방식을 쓴 영화다. 여러 롱테이크를 촬영 테크닉이나 CG 눈속임을 통해 단 하나의 테이크인 것처럼 만든 영화. 그야말로 하나의 덩어리. 일단 훌륭하다. 대략 어느 부분에서 접합 했을 것인지 눈치껏 찾아낼 수는 있겠지만, 하여튼 하나의 덩어리로써는 꽤 잘 만들어진 모양새. 무엇보다 오로지 하나의 마스터 샷으로만 영화가 진행되기에, 클로즈업 같은 커버리지 샷들이 존재하지 못했다는 점이 나에겐 큰 포인트였다.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전쟁 영화에서 주인공이 오래된 흑백 사진을 볼 때 그 사진을 따로 클로즈업으로 빼서 보여주겠지. 근데 이 영화는 그걸 못하는 게 핵심이라는 거다. 그래서 주인공이 사진을 볼 때, 그냥 카메라가 그저 그 모습을 비추고 있을 뿐. 이로인해 사실적인 느낌도 들지만, 뭔가 영화에서 감정적인 측면이 덜어진 것 같은 인상이라 좋았다. 극한의 상황을 다루는 전쟁 영화야말로 여러 감정들이 난무하기 쉬운 장르 아닌가. 그런데 영화는 그걸 최대한 덜어낸 인상이다. 어차피 상황 자체가 급박하고 감정적이니, 그렇게 덜어내도 관객 입장에서는 부족한 느낌보다 담백한 느낌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바로 그게 좋았다. 하나의 테이크로 영화 전체를 찍었다는 그 자랑 아닌 자랑, 허세 아닌 허세 보다도 커버리지 없이 영화를 이어갔다는 점에서 좋았다는 거.

그걸 빼면 사실 대단한 촬영인 건 분명하지만, 굳이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어야만 했는가-에 대해선 다소 의문이다. 때때로 기술이 이야기를 잠식하는 느낌? 굳이 그렇게 찍을 필요 없었잖아. 물론 굳이 그렇게 안 찍을 필요도 없었지만... 하여튼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촬영보다는 오히려 조명적인 측면에서 더 흥미로웠다. 로저 디킨스가 빛을 쓰는 방식은 가히 경천동지의 경지다. 특히 파괴된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밤 시퀀스는 그야말로 완벽. <스카이폴>에서 스카이폴 저택이 불타오를 때의 장면과 유사하다. 아마 샘 맨데즈도 그거에 꽂혀서 한 번 더 재현한 거겠지.

기술적인 부분들은 이 정도로만 이야기하면 될 것 같고. 사실 이야기도 무척이나 단순한 영화다. 통신망이 끊어진 상태에서, 대공격을 준비중인 아군의 연대에 편지 한 장을 부쳐야 한다. 그 편지 한 장을 전해야만 하는 한 병사의 이야기. 뭐, 이런 극한 상황 속의 이야기일수록 단순함이 미덕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왜 좋았냐... 바로 주인공의 태도 변화와 그로인한 후반부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주인공인 스코필드는 이 임무에 그야말로 차출되었다. 그것도 상관의 강압적인 명령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전우이자 친구인 블레이크의 선택으로. 그래서 그가 중반부에 묻는다, 블레이크에게. '왜 하필 나였냐'고. 거기에 블레이크는 아무 이유 없었다고 대답한다. 별 것 아닌 임무일 줄 알았다고. 그래서 너를 고른 거라고.

상관이 블레이크를 고른 이유는 일견 이해가 된다. 지도에 능통하니 찾아가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겠고, 무엇보다 찾아가야할 그 곳에 친형이 복무하고 있으니 중간에 탈영하거나 다른 곳으로 샐 염려도 없다. 친형 목숨이 걸렸는데 도망가겠어? 그야말로 능력과 동기 면에서 출중했던 거지. 허나 스코필드가 선택된 데에는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냥 블레이크가 골랐으니까, 블레이크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까 같이 보낸 거다.

때문에 스코필드는 언제든지 임무를 그만둘 수도 있었다. 심지어 블레이크 마저 중간에 전사하잖아. 그럼 더더욱 모든 걸 포기할 수도 있었지. 허나 스코필드는 그 순간부터, 오히려 블레이크 보다 더 강한 의지로 달린다. 그리고 바로 나는 거기에서 이 영화에 감복했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의지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며 감동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샘 멘데즈는 삶의 약동까지 묘사해 내었다. 익사해 퉁퉁 불은 시체들이 강 하류를 범람할 때, 스코필드는 그 시체들 위를 지나며 일견 끔찍한 듯 자지러지게 몸을 떤다. 그게 나는 죽지 않으려는, 죽음과 구별 되려는 삶의 처절한 태동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들이 한데 모여 분출되는 곳. 그게 바로 이 장면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울 수 밖에 없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이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걸고 뛰는 스코필드에게서 삶의 약진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기에 <1917>은 그냥 촬영이 뛰어난 영화, '우와, 이 영화는 두 시간 내내 한 테이크로 촬영 됐대!'라는 칭찬 이상의 것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촬영과 조명 같은 기술적인 부분을 넘어버리는 이야기와 캐릭터의 힘. <1917>은 그래서 좋은 영화이지, 단순히 멋있게 잘 찍었기 때문에 좋은 영화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삶에 대한 숭고한 의지로 시간을 내달리는 영화. <1917>은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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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20/02/20 17:29 # 답글

    현실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사실 뉴스로도 나오지 않은 많은 일들이 일어났죠. 지금은 서로 인터넷을 통해 지인의 일들도 빠른 정보로 받아들게 되지만, 그 시절엔 아니었던 겁니다.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묻혀지고, 게임과 라이언일병구하기 덕문에 2차세계대전만 조명되어 1차세계대전은 좀체 조명되지 않은 상태였죠. 생각해보면 아직 모르는 일들이 많은 거에요. 내가 관심을 들이지 않은 세상의 이야기들과 아이러니 혹은 기적들이 많은 겁니다. 감독 자신의 할아버지의 일화를 기반으로 상상과 디테일을 추가한 사실에 대해서는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이 사실을 듣다보니 그렇더라고요. 세상에는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이 많잖아요. 이 이야기는 큰 역사적인 이야기를 다뤘지만, 그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역사 속에 없지만 그에 비슷한 경험들이나 업적을 남기는 겁니다. 단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죠. 다시 한번, 제가 아직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매우 크게 실감합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텍스트와 극적인 연출도 좋아하지만, 것보다는 스크린 안의 무언가가 세포단위로 체감되는 영화요. 그냥 눈으로 보고 뇌로 상상하는 게 아니라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내 몸 자체를 휘감는 현장감 말입니다. 저는 [클로버필드]에서 그 경험을 처음 느끼고 흥분하며 그런 영화들을 찾아다녔어요. 한편으로 이 느낌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는 게임을 하거든요. 게임을 하면서 보통 짧은 단위의 게임은 휴일날 거기 죽치고 않아 5~6시간 넘게 세션을 뛰는 일이 많아요. (최근에는 이런 플레이를 중시하는 로그라이크 게임들도 많이 나왔죠.) 게임의 서사와 완급조절이 뛰어나다면, 그 것은 하나의 여정처럼 느껴지곤 했어요. 어떤 게임은 시간 단위와 레벨 단위로 끊지만, 심리스 게임은 리얼타임으로 진행되니까. 그나저나, 이 영화에 그런 즐거움이 있다고 누가 미리 말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신념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에 몰입하면 주인공이 자신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데, 온전히 주인공의 생각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주인공의 껍데기를 쓴 자신이 되거든요. 말하자면, 주인공의 동기에 내 생각이 상위입찰(?)했달까. 저는 그런 경험을 해요. 그래서 그 달리기 씬에서 제가 느낀 건 증명이었던 것 같아요. 아군을 구하고 참극을 막겠다는 신념을 어떤 사람들은 느끼고 감동하겠지만, 저는 거기서 하필 토니스콧 감독과 다이하드가 그리는 남자로서의 자기 증명을 느껴버린 겁니다.

    물론 도덕적 관점의 신념과 의지도 있겠죠. 하지만 죽음 앞에 서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죽음은 자신만이 홀로 겪는 거라서, 죽어가는 과정에서 고독해지면서,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픈 격렬한 감정이 드는 거죠. "뭐라도 남겨야겠다. 그러고 싶다." 전쟁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잖아요. 프로파간다에서는 모두가 역사에 남을 전사라고 하지만, 현실은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허무하게 죽는 사병들이 많았습니다. 그 현실을 많이 본 사람이라고 생각해봐요. 의지도 있겠지만 광기어린 집념도 있을 겁니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살아남았는데"라는 생각에서 "나는 절대 이렇게 사라지고 싶지 않아"라는 생각도 있는 거죠.

    그게 무의미하고 이기적인 사고방식은 아닐 겁니다. 고통 속에 있다보면, 그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요. 생존본능에 따라 그 생각이 적군에게 적용되진 않지만, 아군들을 보면서 그 생각이 그들에게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그 일이 터진다면 누구나 살아남고 싶고, 그래서 자신의 뜻과 가치를 이어나가고 싶을 거에요. 후대 자손들에게 그 시절이 이야기를 하거나요. 허나 지금 봐요. 영화 상에서나 현실상에서나 모두가 그러진 못했습니다. 그 안타까움이 전신으로 몰려드는 거죠. 그걸 막고자 하는 의지로 귀결되는 과정은 거기에 있는 겁니다.

    정리하자면, 격렬한 허무주의적 세계관 안에서 나 하나의 가치를 찾는 과정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런 거죠. 저도 왠 게임에 빠져서 (...) 눈팅만 하다가 간만에 영감받아서 글 쓰네요. (...)
  • CINEKOON 2020/02/21 23:09 #

    저도 그런 감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타인을 구하기 위해 달린 것일 수도 있지만, 장대한 역사의 맥락 속에서 그래도 무엇인가를 남겨보려는 자의 파닥거림 일수도 있죠. 두가지 다, 또는 다른 의견들도 대부분 맞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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