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5 12:38

싸이코, 1960 대여점 (구작)


장르 영화로써 거의 모든 부분에서 선구자 격인 작품.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개 방식이나, 캐릭터들을 묘사하는 것으로써의 미장센 활용 방식, 호러 슬래셔 장르의 원류답게 섬뜩함을 제시하는 방식, 그리고 그 유명한 맥거핀을 활용하는 방식 등. 여러 부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영화. 허나 그런 영화도 만들어진지 거의 60여년이 흘렀으니, 2020년 이제 와 다시 본다 했을 때 별다른 재미나 감흥이 있을쏘냐. 근데 시발 있더라.

고전으로써의 가치라든지, 얼마나 잘 만들어진 영화였는지 등등의 칭찬들을 차치하고 보아도 그냥 존나 재밌는 영화라고 본다. 주인공인 줄 알았던 캐릭터를 소개하는 데에서 딱 첫 오프닝 씬 하나만 쓴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씬에서 이야기에 그냥 바로 시동 걸어버림. 주인공이 4만 달러 가량을 손에 쥔 상태로부터 이야기가 그냥 급류 타듯이 쏜살처럼 나간다. 허나 그 와중에도 도로 위에서 만난 경찰이나 중고차 딜러 등의 인물들을 만나게 해 긴장감 적절히 새겨주고. 

드디어 당도한 베이츠 모텔. 이전까지는 히치콕의 전작인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같은 느낌의 추적극인가 싶다가, 주인공이 이 모텔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호러 스릴러로 급 유턴한다. 보통 이런 류의 슬래셔 영화들 볼 때마다, 개인적으로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이면서도 항상 운명론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저 여자가 저 모텔로 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내지는, '저 모텔이 그런 모텔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등등. 신을 믿진 않지만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그 양반은 진짜 악취미 기질 있는 거여.

만들어진지 60년 된 영화인데, 여전히 먹히는 장면들이 많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급인 샤워 장면이야 말할 것도 없고, 어두운 밤에 불 켜진 저택 2층에서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미지 같은 것들도 여전히 서늘하게 무섭다. 사실 결말까지 보고 나면 그냥 멀대 같은 남자 한 명이 설쳐대는 영화일 뿐인데도 이 정도로 무섭다는 건 히치콕이 연출을 존나 잘 한 거지. 베이츠 모텔이라는 공간이 주는 서늘하고 비어있는 느낌과, 히치콕 특유의 관음증적인 장면들이 결합되면서 뭐랄까 누군가가 끊임없이 주인공들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잘 연출 해낸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됨.

4만 달러라는 맥거핀을 활용하는 방식이나, 현세기 타란티노를 떠올리게끔 하는 전개는 그야말로 획기적이다. 중반까지만 보면 그냥 한 여자가 돈 들고 튀는 이야기처럼 밖에 안 보이거든. 근데 거기서 갑자기 살인마를 만나게 되고, 주인공인 줄 알았던 그 여자가 광탈하는 존나 짜릿한 전개. 서로 다른 이야기 두 개가 거의 접붙은 느낌의 영화인데, 그것 자체가 겁나 획기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에서, 상술했던 운명론적인 접근이 더 떠오르기도 하고. 당신이 4만 달러를 갖고 있든, 쭉쭉빵빵 절세 미인이든, 잘생긴 애인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든 간에 가다가 베이츠 모텔 잘못 들르면 다 좆되고 멜로 영화에서 호러 영화로 그냥 인실좆 당한다- 이 말이다. <구니스>의 아이들이든, <쥬만지>의 아이들이든 간에 제아무리 가족 모험 영화 주인공들이었어도 길 가다 베이츠 모텔 숙박계에 이름 쓰면 그 순간부터는 그냥 호러 슬래셔의 길로 가게 된다- 이 말이여. 좀 웃기는 예를 들긴 했지만, 하여튼 간에 이렇게 재수 지지리 옴 붙은 장르 체인지의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히치콕 이 양반 필모그래피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작품 순서가 <현기증> -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 <싸이코> - <새>였던 시절이 있네. 예전에 어디에선가 봉준호 관련 이야기를 하면서, '<살인의 추억> - <괴물> - <마더>로 이어지는 라인은 봉준호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시절이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히치콕의 이 라인이 그에 못지 않은 것 같다. 히치콕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서구 영화계가 감히 자랑스러워해도 될 만한 라인 아니냐, 이 정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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