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8 03:08

젠틀맨 극장전 (신작)


따지고 보면 별 것 없어뵈는 이야기고, 이런 이야기도 이제 지천에 널렸다. 영화 역사가 이제 130년을 훌쩍 넘기지 않았나? 그러니까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는 없는 거라고. 그런 상황에서, 가이 리치는 말하는 듯 하다. '같은 이야기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젠틀맨>이 가이 리치의 최고작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이 리치 스타일의 정점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가이 리치가 이제서야 돌아왔다고, 가이 리치가 초심을 찾았다고 말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젠틀한 영화다. <맨 프롬 엉클>과 <킹 아더>의 장르물 늪을 거쳐 <알라딘>으로 잠시 어울리지 않는 외도를 했던 가이 리치가, 이 정도면 제대로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플롯은 겁나게 꼬여있다. 이건 쿠엔틴 타란티노를 떠올리면 된다. 그리고 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인이나 스타일이 굉장히 영국적이고 클래식하다. 그건 매튜 본 떠올리면 되고. 가이 리치의 진정한 복귀작이라면서 타란티노와 매튜 본을 언급하다니 무엄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이 리치는 언제나 그랬다. 그는 언제나 타란티노와 매튜 본을 닮은 영국 악동이었다고.

별 것 없어 보이는 우연들의 연속을, 비선형적인 구성으로 설명하면서 운명으로 둔갑시키는 영화다. 부가적인 설명 다 빼고 그냥 순서대로 들으면 어이가 털리도록 얻어 걸리는 게 많은 전개다. 한 인물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본다면 더욱 그렇지. 그렇게만 보면 매튜 멕커너히는 그냥 운빨 존나게 좋은 인간인 거고, 헨리 골딩은 재수 더럽게 없다가 더럽게 좋다가 또 더럽게 없는 인물일 것이며, 콜린 파렐은 그냥 어쩌다 연루될 인물일 뿐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이 캐릭터들과 그 이야기들을 마구잡이로 섞고 재배열 해놓으니, 이토록 또 운명적일 수가 없는 것이야. 한 인물의 재잘거림으로 전체 이야기가 진행되고, 이 쪽의 이야기가 저 쪽의 결정적인 전개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 살다보면 다 얻어걸린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신이라는 작자가 철저하게 계획 해놓은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째 영화가 그런 모습들을 성실히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짐.

영화를 볼 때 좀 덜 중요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사실 제일 중요한 것들 중 하나. 그것은 바로 스타일이다. 아니, 연출 스타일이나 편집 스타일 말고. 그냥 스타일. 영화가 스타일이 존나 좋다. 각 캐릭터들의 성격에 맞춘 의상들도 영국스럽게 깔끔하고, 로케이션과 세트들도 그 느낌이 충만함. 연출과 편집만으로도 이미 재미난데 스타일까지 좋으니 이런 게 바로 대마하는 기분이구나 싶다.

근데 이 정도면 휴 그랜트가 연기한 플레처는 가이 리치 오너캐 아니냨ㅋㅋㅋㅋㅋㅋㅋㅋ 초반에 썰 풀면서 빌드업 짜는 거랑 지가 쓴 시나리오로 영화 찍으라고 추천서 날리는 거랑 보면서 개웃김. 심지어 막판에 미라맥스 사무실 뒤에 자기 영화인 <맨 프롬 엉클> 포스터 붙여놨어. 이 악동 같은 양반.

그냥 쌈박하게 재미있는 영화다. 무엇보다, 가이 리치가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아 굉장히 반가웠다. 그렇다. 물 만난 물고기는 이렇게 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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