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1 15:10

살인의 추억, 2003 대여점 (구작)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뉴 웨이브를 이끈 영화. 봉준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초반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고 또 흥행적으로나 비평적으로 모두 잘된 영화이지만, 감독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사 전체의 흐름에 있어서도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돌이켜보니 박찬욱의 <올드보이>나 김지운의 <장화, 홍련>도 모두 2003년 영화였었네. 대체 2003년에 한국 영화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장르 영화적 외피와 그걸 두른채 웅크리고 있는 주제적 속살 모두 잘 어우러진, 그야말로 훌륭한 영화다. 일단 영화를 잘 만들었고 못 만들었고를 떠나 끝내주게 재밌다-라는 점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함.

장르 영화로써 가장 큰 장점은, 로컬라이징이 잘된 장르물이라는 점. 애초 장르라는 개념이 프랑스에서 촉발되고 미국에서 완성된 것 아니던가. 물론 <살인의 추억> 이전에도 한국 영화계에서 스릴러 장르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허나 그중 대개가 다 미국식 스릴러였다는 게 포인트지. 영화를 만들어본 사람이라면, 각본을 써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어떤 특정 장르에 경도되어 그걸 쓰기 시작하는데, 막상 쓰다보면 한국의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굉장히 많아. 또는 한국적으로 더 살릴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도,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미국의 영화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포기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런데 봉준호는 그 지점을 곧바로 그냥 꿰뚫어버렸다. 할리우드 스릴러에서는 볼 수 없는 농촌 스릴러. <세븐>의 두 형사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뉴욕의 뒷골목을 활보할 때, <살인의 추억>의 세 형사는 논밭을 구르고 무당의 힘을 빌린다. 윤종빈의 <범죄와의 전쟁>도 로컬라이징이 꽤 잘된 장르 영화라고 항상 생각하는데, 역시 그 이전에는 <살인의 추억>이 있었고 또 한 수 위였던 것이다.

배우들의 기깎기는 물론이고 쇼트 내에서의 세밀한 연출도 빛을 발한다. 봉준호의 영화들에서 답을 갈구하고 또 그에 절박한 인물들은 항상 옆모습으로 드러난다. 세 형사와 형사반장이 옆모습으로 답을 갈구할 때, 박해일이 연기하는 유력 용의자는 태연히 앞모습으로 응한다. 어느 하나 숨길 것 없어서 당당하다는 뉘앙스로. 그리고 그 뉘앙스를 역전시켜, 송강호가 연기하는 박두만의 정면 얼굴로 영화를 마무리 짓는 불도저 같은 태도. 배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이미 <대열차 강도>에서 봤고, 이후 <500일의 썸머>에서도 봤다. 그 둘 모두 각자 방면에서 효과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송강호의 이 정면 응시를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본인의 분노와 허무함을 비롯해 책임의식까지 관객에게 떠넘겨버리는 가열찬 엔딩. 시발, 이렇게 영화 끝내면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지, 뭐.

전체적인 분위기도 좋은 영화고, 개별 쇼트들의 연출적 완성도도 뛰어난 영화지만, 근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재미의 근간에 각 캐릭터들의 캐릭터성이 있다는 것.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그 모든 것들을 받아 지탱해주는 배우들의 앙상블까지. 뭐, 이미 유명한 영화라 내가 말 더 보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긴 하지만 하여튼지간에 굉장한 영화다. 이번에 다시 본 게 거의 10년 만인 것 같은데 다 알고 봐도 재밌네. 만들어진지는 이제 17년 된 건데, 여전히 이토록 세련 되었다니 진짜 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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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D U MISS ME ? : 마더, 2009 2020-03-03 18:29:07 #

    ... 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서술하는 힘 하나만으로 이상한 쾌감을 주는 데에 성공한 영화다. 봉준호의 영화들치고는 이야기가 꽤 단조로운 편에 속한다. &lt;살인의 추억&gt;나 &lt;기생충&gt;에는 여러가지 반전과 트릭들이 있었고, 그나마 좀 단순한 편으로 치부되는 &lt;설국열차&gt;나 &lt;옥자&gt; 같은 경 ... more

덧글

  • 페이토 2020/03/01 15:50 # 답글

    다른걸 다 떠나서 (물론 다른것도 말씀처럼 뛰어난 영화지만) "밥은 먹고 다니냐"가 애드립이 정말 맞다면, 이건 정말 세계 영화사에 남길 애드립이 아닌가 싶은..
  • CINEKOON 2020/03/03 18:54 #

    전 그래서 해당 대사의 영어 자막이 좀 더 아쉽더라고요. 물론 달리 파켓이 노력하기도 했고, 봉준호도 감독으로서 그 자막에 만족하는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제 기억이 맞다면 영어 자막으로는 '너 같은 인간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냐?' 정도 였다고 들었던.
  • 로그온티어 2020/03/01 21:27 # 답글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주인공 두 명의 입장이 변하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송강호 내지 다른 형사들이 아무나 잡고 패고 다니는 씬들 때문에 (...) 그들이 너무 막무가내에다 폭력적으로 보이죠. 그래서 그때 김상경이 등장할 때 김상경이 오히려 깨어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인권을 보다 신경쓰고, 진보적이죠.

    허나 마지막에 폭력적으로 변하는 김상경을 저지하는 인물은 송강호입니다. 저는 그 입장차가 묘하게 좋은 거에요. 결국 사건을 조사하면서, 인권 중심의 수사를 하려고 했던 김상경은 심적으로 타락해버리고, 야만적이었던(?) 송강호는 오히려 침착한 성격이 됩니다. 성격과 성향을 떠나서 하나의 강렬한 사건은 누군가에게 신념을 버리게 만들지만, 누군가에겐 새로운 신념을 심어주게 만드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지지하던 상관없이요. 그 정치중립적인 성향이 좋았어요. 중립 기어를 놓고 보니, 이념에 양념된 캐릭터가 아닌, 사람의 본질이 보이더라는 겁니다.
  • CINEKOON 2020/03/03 18:57 #

    좋은 각본에서는, 항상 이야기를 거치며 주인공이 변화하게 되죠. 첫 챕터의 주인공과 마지막 챕터의 주인공이 성격적으로나 행동적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게 좋은 각본이라고 저는 배웠어요.

    로그온티어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바로 그 점에서도 훌륭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죠. 폭력을 요긴하게 쓰고 무당의 말을 믿는 등 과학수사는 개뿔 육감수사를 우선시 했던 형사가 결국은 과학의 힘을 담고 있는 인쇄지를 인정하게 되고, 반대로 과학과 논리를 신봉하고 이성적이었던 다른 형사는 결국 폭력과 야만의 길로 들어서고... 다시 봐도 썩 잘 쓴 시나리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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