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피는 몬스터 장르 영화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봉준호 감독 말마따나 유괴 영화, 가족 영화, 블랙 코미디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괴물의 존재 그 자체가 일종의 맥거핀처럼 작동하다가, 후반부에 들어서야 온전한 볼거리로 다시 돌아오는 작품. 개봉 당시에 내가 중학생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극장에서만 아홉번 정도를 봤었던 것 같다.
한국 영화계에서 괴수 장르 영화로써 유일하게 성공한 영화이기도 할 것이다. 그 '성공'의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느낌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비평적인 측면과 영화 자체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압도적인 1타지. CG 기술이야 심형래의 <디-워>가 앞서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허나 이야기의 구조와 그 완성도라는 부분에서만 보면 누가 뭐라해도 <괴물>의 압승.
<살인의 추억> 이야기를 하면서 봉준호에게 장르 로컬라이징의 대가라는 표현을 붙여줬었는데, 이번 영화 역시도 그러하다. 다 떠나서 한강이라는 공간 자체가 주는 느낌이 거대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토록 큰 강이 수도 도시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경우가 별로 없거든. 파리의 세느 강이나 런던의 템스 강도 이렇게 넓고 크지는 않을 걸? 반면에 한강은 그 폭도 넓지만 길이도 정말이지 긴 강 아닌가. 이렇게 큰 강이 서울이라는 메가 시티를 가로질러 천천히 나아간다. 그리고 그 강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 봉준호는 한강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하고도 친밀한 공간을 괴물의 둥지로 변모 시키고야 만다. 서울 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서울을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한강 봤을 거잖아. 그게 존나 센거다. 한국적이고 익숙한 공간을 비틀어 버리는 거. 아, 그리고 한국적인 거 또 하나. 한강 출입을 막으려드는 구청 공무원에게 동전으로 가득 채운 컵라면 용기 건네주는 거. 존나 한국적이라 존나 개웃김.
그리고 그 공간을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뛰어다니는 캐릭터들의 모습이 정말 좋다. 대사 작법이나 연기의 방식에서 각 캐릭터들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중반부 트럭을 타고 한강에 침투하게된 일가족의 모습을 비춰주는 부분에서, 대충 만든 지도를 가지고 다들 한마디씩 하는 장면이 있다. 차남 박해일은 지도를 보고 뭐 이런 싸구려 지도에 몇 십 만원이나 준 거냐고 욕지거리를 하고, 막내 배두나는 그 지도가 이면지를 써서 만들어진 것임을 보고 툴툴 거린다. 여기에 아버지 변희봉은 그래도 높으신 전문가 양반들이 만든 것이니 믿을만 할거라고 웅변하고, 장남 송강호는 지도에 관심도 없음. 이렇게 무언가 하나를 볼 때도 각 캐릭터들의 태도나 입장이 모두 다르고, 또 대사들이 그걸 곧이곧대로 녹여내고 있어 캐릭터물로써의 보는 맛이 난다.
<설국열차>와 <기생충>을 보고 봉준호의 '우물'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봉준호의 영화들엔 항상 우물이 있었다고. 그래서 주인공들은 이겨도 이긴 게 아니며, 살아 남아도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의 불씨를 조금씩이나마 지고 가는 인물들이었다고. 나는 그게 <괴물>에서 최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현서는 죽지만, 태주를 살림으로써 결코 그냥 죽은 것은 아닌 게 되었다. 강두는 딸을 잃었지만 아들을 얻었고, 태주는 형을 잃었지만 아빠를 얻었다. 평소와는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일상으로의 회귀. 하지만 좋은 각본이 으레 그렇듯이, 주인공인 강두는 영화 초반의 강두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얼빠진 채로 매점 귀퉁이에서 오징어 다리나 떼어먹던 남자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며 엽총을 손에 쥐고 있는 상태로 닫히는 영화. 나는 강두와 태주가, 정말이지 오래도록 그 매점에서 밥을 먹었으면 좋겠다.
덧글
로그온티어 2020/03/01 21:19 # 답글
저는 좋아하는 게임도 9번은 클리어 하진 못했어요.
문득 떠오른 건데, 9라는 숫자가 북유럽신화에서는 '완전', '끝'을 의미하는 숫자거든요.
즉, 9번이나 보셨으니 뇌에 괴물이 완전히 각인되어 버리게 되신 겁니다. (?)
CINEKOON 2020/03/03 18:53 #
북유럽 신화와 숫자 9에 대해 언급하신 걸 듣고 생각난 건데, 헛소리지만 <갓 오브 워>를 여덟번 더 하면 괜찮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