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3 18:29

마더, 2009 대여점 (구작)


부성애나 모성애 그 자체를 다루면서도 그것의 신격화된 부분들을 해체하는 영화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허나 그의 필모그래피가 항상 그랬듯, 봉준호는 짐짓 어렵고 불편해보이는 이야기를 능수능란한 장르의 화술로 전달하는 데에 도가 튼 사람이다. <마더>는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김혜자의 인자한 얼굴을 낱낱이 해체해 짐짓 불편함을 느끼게 만들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서술하는 힘 하나만으로 이상한 쾌감을 주는 데에 성공한 영화다. 

봉준호의 영화들치고는 이야기가 꽤 단조로운 편에 속한다. <살인의 추억><기생충>에는 여러가지 반전과 트릭들이 있었고, 그나마 좀 단순한 편으로 치부되는 <설국열차><옥자> 같은 경우에도 마지막엔 꼭 한 방이 존재했다. 그러나 <마더>엔 생각보다 그런 것들이 없다. 전체 얼개는 단순한 추리 추적극이며,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은 결국 또 살인 사건이다. 나름 이야기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진범의 정체' 또한 다소 허무하게 밝혀지고, 또 그마저도 충분히 예측가능한 수준이다. 이처럼 스릴러 장르 영화치고는 뻔해 보이는 이야기인데, 이토록 영화가 재밌을 수 있는 이유는 무얼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미스테리를 풀어나갈 수 있는 단서들을 어떤 타이밍에 어떤 형식으로 전달 하느냐. 거기에서 영화가 판가름 난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과거 회상에서 툭하고 튀어나온 고물상 할아버지의 얼굴 같은 것들.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데 그 등장 타이밍이 너무나 적절하고 또 소름 돋을만한 지점이라 놀랍다. 단서를 친절하게 대놓고 조합해주는 것이 아니라, 런닝타임 내내 헨젤과 그레텔 마냥 주워온 힌트들을 관객들 스스로가 재조합 해보고 거기에서 카타르시스 또는 공포를 느낄 수 있게 셋업 해놓은 점도 대단하다. 고물상 할아버지가 동네의 허름한 창고에서 쌀알들을 주워 담을 때, 죽은 여고생이 주인공의 아들에게 바보라고 소리지를 때. 그 순간들에 극중 인물들은 호들갑 떨지 않지만, 관객들은 호들갑 떨 수 밖에 없는 지점들. 영화가 장르 영화로써 그런 걸 너무 잘해놨다.

신격화된 모성애를 해체하는 부분도 분명 있지만, 또 달리 말해 결국 다른 방식으로 모성애를 신격화 시키는 영화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엄마라는 작자가 아들 살리겠답시고 저런 짓거리까지 하다니'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본다면 그건 분명 모성애를 해체하는 방식의 관념이지. 근데 또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듯,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니까 아들을 위해 저런 짓까지 할 수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보면 그건 또 모성애의 위대함을 다른 방식으로 조립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 두 생각 사이에는 가치관의 딱 한 끗 차이 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가 더 무서움.

이른바 '국민 엄마'인 김혜자를 이런 식으로 활용한 영화는 지금까지도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익숙한 배우의 새로운 일면을 꺼내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가치있는 영화라고 본다. 그리고 봉준호가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털어먹은 기념해서 <살인의 추억>부터 시작해 <괴물>, 그리고 이번 영화 <마더>까지 연속으로 재감상한 것이었는데, 매번 말하지만 정말이지 이 세 영화의 순차적 라인업은 한국 영화사에 있어서 길이 길이 남을 순간이다. 이후 나온 <설국열차>와 <옥자>가 살짝 기대 밖이었지만 최근 <기생충>으로 다시금 클래스를 증명한 시점이니, <살인의 추억> 다음으로 <괴물>이 나왔듯 이제부터가 더 기대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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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D U MISS ME ? : 결백 2020-06-11 21:38:36 #

    ... 첨부되어 있다. 예상 못했던 부분은 아니다. 애초 누명 쓴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변호하는 딸의 이야기인데 어떻게 멜로적 요소가 없을 수 있겠어. 애초 봉준호의 &lt;마더&gt;도 그러할진대 이런 시놉시스를 갖고 그걸 아예 도려낼 수는 없는 거다. 장르가 액션이든 코미디든 법정 스릴러든 일단 어머니와 그 딸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 more

덧글

  • 페이토 2020/03/04 05:17 # 답글

    소름끼치게 천재적인 영화, 베스트 봉준호 무비. 다음 영화도 기대되지만, 그 기준점이 말씀대로 2000년대의 살인의추억-괴물-마더라면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가 될듯...
  • CINEKOON 2020/03/13 17:20 #

    <기생충>으로 일단 필모그래피에서의 새 장을 열어젖히셨으니 이후 작품이 어떻게 될지가 관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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