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7 22:24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4 대여점 (구작)


넷플릭스를 비롯한 스트리밍 서비스에 자사의 작품들을 결코 풀지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 했던 지브리 스튜디오.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했던 말은 아니고 아마 스튜디오 내의 다른 간부급 제작자가 했던 말 같은데, 뭐랬더라? 스트리밍 서비스는 푼돈으로 싸게 취급 받는 느낌이라 싫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근데 갑자기 넷플릭스에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들 왜 이렇게 많이 풀림? 그딴 말 지껄였던 게 언젠데 대체 넷플릭스가 얼마나 거금을 줬길래 푼돈 취급 받는 느낌에서 이렇게 급히 벗어난 거지? 하여튼 이건 그냥 다 쓸데 없는 말들이고...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상황이었던지라 넷플릭스 뒤지고 있던 차에 잘 됐다 싶어 미야자키 하야오 정주행 비스무리한 거나 해보기로 했다. 그 첫 타자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게 하야오의 첫 장편 데뷔였던 것은 아니고, 바로 직전에 <루팡 3세 - 칼리오스트로의 성>이란 작품을 만들었더라고. 그것 역시 넷플릭스에 있고. 허나 어째 첫 시작은 나우시카로 해야할 것 같아 그냥 꼴리는대로 시작함. 뭔 소리야

애니메이션으로써 작화의 퀄리티나 더빙의 퀄리티는 뛰어나다. 허나 그런 테크니컬한 부분들은 다 하나마나한 소리니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 작품으로써의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후 하야오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무척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부분들을 원형으로 간직하고 있는 영화가 바로 이 영화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항상 여성으로 설정하는 점이나 나이대는 항상 소녀인 점. 푸른 하늘 그 자체와 그 곳을 활강하는 이미지를 선호한다는 점. 자연주의적, 환경주의적 태도를 취한다는 점도 그렇고 일본인으로서 원폭에 대한 트라우마를 작품에 중요하게 녹여냈다는 점도 그러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서는 항상 여성들이 중요하다는 것.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그 중에서도 어린 소녀의 이미지를 하야오 그가 유독 좋아한다는 것 역시도 다들 익히 아는 사실일 거다. 때문에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늙수구레한 아저씨의 여성 취향이 변태적으로 드러난다고 해서 싫어하며 까는 경우도 있다. 이 부분에 아주 공감이 안 가는 것은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보임에도 소녀 캐릭터들의 외모가 이야기의 진행에 큰 역할을 하고 또 속옷 등을 은밀하면서도 대놓고 묘사한다는 점 등에서 특히 그렇다. 그러나 이건 그냥 개인적인 견해인데, 그런 하야오의 여성취향적인 부분들도 분명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그의 작품들 대부분이 앞서 말했듯 자연주의적 환경주의적 태도를 주로 취하기 때문에 주인공을 여성으로 삼는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보통 대자연이나 지구 그 자체를 여성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잉태와 양육의 이미지가 남성보다는 여성에 더 알맞기 때문에 그런 부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야오의 은밀한 취향이 아예 안 반영 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유독 산업 문명, 기계 문명을 비판적으로 그리는 그답게 그러면서도 또 동경하는 것 같지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기본 설정 역시도 바로 거기에서 출발한다. 고대의 산업 문명이 자멸의 길을 걸으며 환경을 파괴하자, 결국 이 꼴 나지 않았냐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 존나 싫은 건, 지구가 <매드맥스> 마냥 모래사막으로 망한 것도 아니고, <레인 오브 파이어> 마냥 불도마뱀들 투성이의 상태로 망한 것도 아니라는 거다. 씨발-----, 다른 것도 아니고 존나 징그러운 거대 벌레들이 지구를 나와바리 삼은 세상. 이보다 더 끔찍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설정이 또 있을까? 나 어릴 때 B급 비디오용 거대 거미 괴수 영화 보고 졸도할 뻔했던 사람인데 이걸 다시 보고 있자니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밖에 안 들더라.

여러 국가들이 얽혀있는 세계관은 나름 큰 편인데, 그 묘사는 대충 에둘러대는 수준이라 그 사이즈가 잘 와닿지 않는다. 이야기 전개에 좀 불필요해보이는 부분도 많고. 알고보니 이거 하야오가 젊은 시절에 잡지에다가 연재했던 만화를 리메이크해 극장용으로 만든 거라며? 어릴 때는 그런 뒷이야기 하나도 몰랐었는데 알고 봐서 그런 건지 뭔지 어째 이야기가 산만해보임. 잡지에 오랫동안 연재 되었던 만화를 극장용으로 만들다보니 이런 사단 났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결말부 바람계곡으로 몰려드는 오무 군단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코즈믹 호러. 여기에 별다른 설명없이 그냥 존나 센 생체 병기쯤으로 나오는 거신병의 충공깽급 브레스. 그 파괴력도 파괴력이지만 그거 쏠 때마다 버섯 구름 피어오르는 것도 그렇고 공교롭게도 딱 두 방 쓰고 끝났다는 것도 그렇고 히로시마&나가사키 누가봐도 핵폭탄 은유잖아. 내 어릴 때 기억으로는 <천공의 성 라퓨타>에도 이런 거 하나 있던 것 같은데. 하여간에 하야오 이 양반의 레퍼런스는 확실하다.

하야오의 초기작으로써나 지브리 스튜디오의 초기작으로써나,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써도 모두 꽤 괜찮게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하야오의 작품들 중 내 최애는 아무래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서...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묘하게 별로이기도 했음. 아, 몰라. 그냥 존나 큰 벌레들이 무진장 많이 나오는 것 자체가 존나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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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포스21 2020/03/08 00:17 # 답글

    흠, 본적이 없는 애니인데... 정작 , 그 애니 제작 당시에 원작 코믹스는 아직 결말이 안난 상태였다는 군요. 그거 만들고 몇년후에 완결이 되었는데 , 그 내용이 영화와는 또 달라져서 한동안 이슈가 되었다고 합니다. 흠.. 이제라도 봐둘까? 하는 생각이 없진 않지만 , 솔직히 벌래는 나도 싫어해서... ^^;
  • CINEKOON 2020/03/13 17:19 #

    결말이 다르다는 말씀이시죠? 원작 결말은 어떻게 났으려나...
  • RNarsis 2020/03/08 11:00 # 답글

    실은 선후 관계가 반대입니다.
    에니메이션 기획을 먼저 했는데, 당시에는 원작 만화가 없는 에니메이션은 스폰서를 따기 힘들어서,
    스폰서 보여주기용 원작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제작 시작 당시에 딱 1권치 연재했던 상황.
    기본적으론 에니메이션을 원작으로 봐야합니다.

    다만... 만화책이 에니메이션이 다루지 않은 그 뒷 얘기를 다루고 있고 테마도 더 본격적으로 파고드는 구석이 있어서 나름 파고들 여지가 있죠.
  • CINEKOON 2020/03/13 17:19 #

    아하, 몰랐던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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