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0 14:16

마녀 배달부 키키, 1989 대여점 (구작)


나 이거 옛날에 본 줄 알았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완전 처음 보는 영화더라고. 근데 시발 이걸 왜 이제 봤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들 중 제일 내 취향에 가깝던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만큼 이 영화가 좋았다는 것은 아니다. 허나 영화적 완성도를 논외로 하고 순수하게 영화적 규모와 이야기, 주제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가장 내 취향과 맞았던 영화는 <마녀 배달부 키키>가 아닐까-한다. <이웃집 토토로> 보고나서도 말했었는데, 확실히 하야오의 영화들은 가볍고 미시적인 이야기일수록 나랑 더 잘 맞는 것 같은 느낌.

'빗자루 타고 날아다니는 마녀'라는 설정은 존나 초자연적인데, 그 마녀가 하는 일이라는 게 택배 또는 퀵서비스 같은 존나 현실적인 일이라는 점.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느끼는 초보 마녀의 감정이, 현 시대 사회초년생들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다는 점에서 훨씬 더 공감하기 수월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마녀라는 존재가 저 유럽 섬나라의 마법 세계와는 다르게 완전히 공개되고 개방되어 있는 세계관. 그래서 각종 비행기들과 마녀의 빗자루들이 공존하는 세상.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이미지를 자아내는데 그 마녀가 택배 일까지 한다고? 이 정도면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두 설정을 적절하게 조합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다.

그런 흥미로운 설정을 갖고 있는 영화이지만, <이웃집 토토로>와는 또 딴판으로 와닿는다. <이웃집 토토로>의 이야기는 존나 뻔했지. 그러나 대단히 인상적인 이미지들로 승부를 보는 영화였다고 생각 하거든. <마녀 배달부 키키>는 반대라고 본다. 생각보다 마음에 깊이 남는 이미지는 별로 없음. 허나 그 이야기의 귀염성, 그리고 마음에 깊숙이 들어오는 주제. 그것만으로 충분히 차고 넘치는 영화인 것이다.

까놓고 말해 딱 스무살이 된 청춘들에게 더 좋을 영화다. 경제적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로부터 물리적으로 독립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드는 과정. 돈을 처음 벌었을 때의 설레임과 뿌듯함, 그리고 비릿함. 집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서 활짝 웃었던 모습과, 집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서 울적해졌을 때의 모습. 그런 사회초년생들의 어떤 순간들을 이 영화가 너무 잘 잡아내고 있었다. 키키 말마따나 다들 그렇잖아. 행복하고 기쁘면서도, 가끔은 또 우울한. 그걸 영화가 너무 잘 보여준다.

이미지도 따뜻하고 모든 캐릭터들도 온기있다. 유럽 문화권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뭔가 잡탕찌개처럼 보이겠지만, 그럼에도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주는 낭만도 무시 못한다. 전체적으로 아늑한 느낌의 영화. 하야오 이 양반, 소소한 이야기하니까 훨씬 나랑 더 잘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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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dj898 2020/03/16 08:41 # 답글

    말씀처럼 저도 제일 좋아하는 미야자끼옹 작품이죠.
    글쿠 보니 저도 중고교시절을 가족 사정으로 혼자 자취를 했었고 대학시절은 먼 이국땅에서 혼자 지냈는지라 말씀처럼 그래서 더 좋아 하는건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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