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2 15:26

붉은 돼지, 1992 대여점 (구작)


넷플릭스 덕에 조작된 기억들을 재구성했다. <마녀 배달부 키키>만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붉은 돼지>도 지금까지 내가 본 줄 알고 있었지만 알고보니 안 본 영화더라고. 고맙다면 고맙다, 넷플릭스야.

<마녀 배달부 키키>랑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감상이다. 일단, <마녀 배달부 키키>를 이야기하면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다루는 이야기는 규모가 미시적일수록 나와 더 잘 맞는 것 같다-라고 이야기 했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천공의 성 라퓨타>처럼 인류의 존속이 걸린 크고 무거운 이야기들보다는, 어린 마녀 소녀가 택배 배달하는 일을 하며 사회 초년생으로서 성장하는 조그마한 이야기가 훨씬 더 나와 잘 맞았었다고. 그 부분에서, <붉은 돼지>도 똑같다. 인류 문명이나 지구의 존속 따위를 논하는 것 없이, 그냥 시대에 던져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아, 아니. 돼지의 이야기. 거창한 이야기의 규모보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알콩달콩한 에피소드 형식의 구성이 참 매력있다.

그러면서도 <마녀 배달부 키키>와는 또 조금 다른게, 나는 그 영화 꽤 재밌게 봤지만 그럼에도 <이웃집 토토로>만큼 인상적인 이미지는 별로 없었거든. 허나 <붉은 돼지>는 <마녀 배달부 키키>에 비하면 좀 더 이야기가 단조롭지만, 그 모든 걸 상쇄해주고도 남는 탁 트인 활강의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전투기가 여러대 나와 도그 파이팅을 펼치지 않아도, 그냥 빨간 비행기 한 대가 시퍼런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시원한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 것.

감독의 영화들에서 하염없이 반복되는 하늘과 활강의 이미지도 좋지만, 소품 등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그 안에 깃든 낭만의 풍기가 확 베어 나오기도 한다. 값싸보이는 나무 탁자 위에 올려진 구식 라디오와 반쯤 남긴 와인병, 구깃구깃한 신문지와 파라솔 대신으로 기둥과 엮어만든 우산까지. 가만 보면 그냥 일반적인 정물화의 구성인데도 하늘을 날으는 고독한 현상금 사냥꾼의 아지트가 그 따위로 장식되어 있으니 괜시리 멋이 더 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하야오의 영화들 중 공간적, 시간적 배경이 가장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대놓고 이야기는 않지만 대략 큰 전쟁을 앞두고 있는 시간대로 보이고, 파시즘 정부 묘사와 함께 과거의 적으로 설정된 전투편대 휘장 따위를 보면 명백히 독일군. 그러니까 이 돼지는 쇼가야키도, 이베리코도 아닌 포르케타였던 것이다.

하여튼 하야오의 작품들 중 재밌게 본 축에 속한다. 여전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건 그게 너무 대단했던 거고. 딱 이 정도 규모의 이야기가 역시 나랑 잘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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