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3 17:03

맨 프롬 UNCLE, 2015 대여점 (구작)


가이 리치가 한참 여러가지 시도해보던 시절. 그래봤자 불과 5년여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록 스탁 앤 두 스모킹 배럴즈>나 <스내치>처럼 자신의 과거작들보다는 좀 덜 화려하고, 상업성과 타성에 젖어있던 <셜록 홈즈> 시리즈나 <알라딘>에 비해서는 좀 더 자기 색깔을 낸. 그래서 나쁘게 말하면 어중간해보이고, 좋게 말하면 정도를 지킨 것처럼 보이는 영화. 개인적으로 나는 좋았다.

감독의 최근작인 <젠틀맨>이 그러했던 것처럼, 특유의 그 질감이 좋은 영화다. 가이 리치와 비슷한 무리로 묶을 수 있을 매튜 본의 액션이 좀 더 화려한 편이라면, 이 영화의 액션은 다소 정적이되 그 여유로운 느낌 자체가 인상적임. 미국과 소련을 대표하는 첩보요원 하나씩을 데려다가 각각의 스타일대로 의상이나 소품 등을 쥐어주니 그 자체로 멋스럽다. 여기에 그 둘의 얼굴이 각각 헨리 카빌과 아미 해머라는 것에서 게임 끝. 이 영화를 별로 재미없게 본 사람들도, 하나같이 눈호강 했다는 데에는 동의하더라. 그건 나도 동의함.

개봉 당시에 거창한 첩보 액션 영화로 홍보하긴 했지만, 앞서 말했듯 액션은 정적인 편이고 그마저도 분량이 그리 많지 않다.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액션이라고 해봐야 초반부에 펼쳐지는 고작 5분 남짓의 카체이스가 전부. 이후 액션들은 분량이 적고 거의 파편화 되어 있음. 그러다보니 감독의 의도가 오히려 궁금해진다. 분명히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 보면 총격전이든 대인격투든 간에 액션이 펼쳐질 배경적 구성은 다 마련 해놨거든, 각본이. 특수부대가 보트 타고 적의 비밀기지에 야간기습 강행하는데 여기서 뽑아낼 수 있는 액션은 충분해 보이잖나. 하지만 가이 리치는 그걸 의도적으로 안 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준다. 주인공 둘을 비롯한 특수부대 요원들이 총격전도 벌이고 전력질주하며 적의 기지 봉쇄를 뚫는데, 그 모든 걸 그냥 가이 리치식 몽타주 편집으로 싹 뛰어넘어 버리거든. 그러다보니 감독이 액션 그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고, 그저 구색으로써 여기는 구나- 싶어짐.

때문에 영화는 액션 장르 영화라기보다, 상황 코미디 영화로써의 정체성이 더 강하다. 재밌는 액션은 하나도 없는데, 주인공 둘이 헛짓거리하면서 쓸데없이 자존심 세우는 장면들이 더 재밌음. 아미 해머가 보트 타고 목숨을 건 필사의 퇴각을 감행할 때, 헨리 카빌이 트럭 좌석에 앉아 와인에 샌드위치까지 먹으며 그거 구경하는 장면의 여유로움이 존나 웃긴다. 이후 나오는 전기 의자 고문 장면도 비슷한 예. 고문 기술자가 존나 길게 자기 과거 약력 읊길래, '아, 이 새끼 존나 무서운 새끼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실수로 그냥 바로 죽여버림. 하여튼 존나 이상한 개그 포인트가 있는데, 문제는 그게 나랑 잘 맞았다는 것.

헨리 카빌과 아미 해머는 멋지지만, 그 외의 배우들을 잘 활용했느냐-를 따진다면 좀 아리송하다.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너무 소모적이고, 메인 악역인 엘리자베스 데비키는 허무하며, 휴 그랜트는 괜찮은 편이지만 그 자체로 후속편을 위한 떡밥용 캐릭터인데 알다시피 영화의 흥행이 잘 안 된터라 좀 붕뜬 감이 있다. 헨리 카빌과 아미 해머가 멋지게 나오는 건 사실이지만, 그 외의 요소들을 받쳐줄 조연 캐릭터들이 전무했다는 점에서 더 그 둘에만 집중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있는 것.

사실 제일 재밌는 장면은 헨리 카빌의 나폴레옹 솔로가 자신이 마시던 스카치에 악당이 약을 탔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장면이었다. 일반적인 액션 영화라면 시점샷으로 카메라에 몽롱한 효과 넣고 주인공이 총 꺼내들다가 쓰러졌을 텐데, 여기 주인공은 제일 편한 소파 찾아서 쿠션 받치고 누움. 악당이 뭐하는 거냐고 하니까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는데 그냥 바닥에 넘어졌다가 다칠 뻔했거든'이라고 응수하는 주인공의 여유로움이 존나 좋았다. 뒤로 두 편 정도만 더 시리즈화 되었더라면 더 좋아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못되어서 아쉬운 시리즈 중 하나. 가이 리치는 이후 <킹 아서>에서도 그런 꼴을 반복하더니 결국 <알라딘>으로 다시 일어서게 됨. 어쩌면 가이 리치는 그것을 깨달은 게 아닐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하기 싫은 것도 해야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번에 <알라딘>의 속편 연출 계약서에도 싸인한 것이 아닐까? 형, 형 한동안 흥행 안 되어서 고생했었으니까 <알라딘>처럼 존나 뻔하고 형한테 안 어울리는 영화 연출해도 이해할게요. 그런 거 만드셔야 또 <젠틀맨>처럼 본인이 하고 싶은 거 만들 수 있는 거겠죠? 아무리 봐도 형이 <알라딘> 연출할 구석이라곤 주인공이 도둑놈이었다는 거 하나 밖에 없었는데, 이제서야 형의 큰 그림을 이해했습니다. 열심히 사세요, 가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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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 될 거다. 한마디로 가이 리치가 어떤 연출자인가-에 대해 궁금한 이들이라면 이 영화만 봐도 된단 소리. 개인적으로는 &lt;알라딘&gt;은 물론이고 &lt;맨 프롬 UNCLE&gt;보다도 더 가이 리치 개성이 듬뿍 담겨있는 것 같던데. 문제는 가이 리치 특유의 고질적인 문제점들 역시 그대로 안고 있다는 것이다. 가이 리치의 ... more

덧글

  • 로그온티어 2020/03/13 19:03 # 답글

    약간, 마약전쟁의 두기봉 감독 같은 행보를 걸으시기로 하신 것 같군요
  • 보니 2020/03/14 11:26 # 삭제 답글

    나폴레옹 솔로 시리즈가 한국에서는 생소해도 그나마 서양에서는 인지도가 있어서 엉클의 설립 시기를 보여주는 것에서 아마 외국애들은 오호 하면서 봤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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