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6 18:44

리틀 드러머 걸_SE01 연속극 대잔치


1년 전만 해도 누군가가 '이번에 그 드라마 봤어?'라고 물어보면, '난 원래 드라마 안 봐'라고 대답했을 것. 근데 코로나 19 덕분인지 때문인지, 영화와는 또다른 드라마 매체의 매력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그래서 방구석에 틀어박혀 <이태원 클라쓰>도 보고, <빅 리틀 라이즈>도 보고, 최근엔 <킹덤>도 다 깨고. 그래, 그러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깐느 박의 드라마 도전기도 한 번 봐줘야 인지상정인 것 아니겠어? 그래서 시작한 <리틀 드러머 걸> 감상기. 감상한 판본은 왓챠플레이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감독판.


리틀 스포일 걸!


존 르 카레의 원작이 있으니 박찬욱만의 독특한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기본 설정이 흥미롭다. 거짓과 기만으로 적들을 끊임없이 속여야만 하는 직업으로써의 첩보. 그리고 하나의 배역에 몰입해 끝내는 그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배우라는 직업. 드라마는 그 두 개의 유사 직업군을 결국 완전히 포개어놓는다. 배우의 삶을 꿈꿨던 여자에게 주어진 건 다름아닌 공작원이라는 장르 영화에나 어울릴 법한 직업이었으나, 물리적인 무대와 상영시간만 없을 뿐 일정 기간 내내 특정 캐릭터를 연기해내야 한다는 점에서는 배우나 공작원이나 똑같은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주인공인 찰리가 모사드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던 이유가 어느 정도 이해된다. 그녀는 그저 배우일 뿐이니까. 배우라는 직업이 갖는 활동성과 본능, 도전 의식이 결국 그녀를 공작원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여기에 모사드가 그녀의 가족을 붙잡아두고 있다거나 하는 등의 다른 이유는 필요 없는 것이다. 그냥 그녀는 배우이기에 한 편의 작품을 선택한 것일 뿐.

주변 지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첫 에피소드나 두번째 에피소드까지만 보고 중도 포기한 사람들이 많다더라. 일견 이해가 간다. 또다른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던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 역시도 그러하지 않았었나. 그 영화나 이 드라마나, 기본적인 설정과 이야기가 촘촘하면서도 복잡하기 때문에 도입부의 정신없는 설명들만 보면 넋을 잃게 될 수도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가 없다면 감상하기에는 더 어려울 수도.

<리틀 드러머 걸>이 유난히 더 복잡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도입부에 놓여있는 복잡한 교차편집들이 애시당초부터 불가피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각자의 세력들이 여러가지 공작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드라마는 뜬금없이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배우를 보여줄 따름이니까. 그러나 시리즈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이 인물이 저 인물을 만나고 또 그 인물이 다른 인물을 만날수록 이야기에는 탄력이 붙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끝까지 보려면, 초반부의 난잡함을 좀 참고 지나쳐야 한다는 말.

연출자로서 박찬욱의 인장이 잘 박혀 있는 편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옳다구나 하고 미친듯이 활용한 듯한 각종 벽지들이 그렇고, 인물들이 끌어왔던 감정들을 섹스로 폭발시킴과 동시에 진정시키는 방식, 계단이나 시점샷을 사용하는 방식들도 그렇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일 연출은 세번째인가 네번째 에피소드에서 나오는데. 찰리가 글을 읽고 있을 때 모사드 공작원들의 계략으로 인해 쌀림이 자동차 사고로 위장 당해 죽는 장면이 바로 붙는 순간. 그 부분 연출은 정말 좋더라.

문제는, 그 이외 연출들이 썩 좋은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분명 인상적인 쇼트와 상황들은 있다. 그러나 때때로 좀 과한 느낌이다. 박찬욱이 연출을 비주얼로 뽑아먹는 사람이라 글로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하여간에 시즌 피날레까지 보고 나면 내가 무슨 소리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그런 아방가르드한 연출들이 그 자체로 싫었다는 건 아닌데, 지금 이 시리즈의 분위기에 어울렸는지를 기준으로 삼고 생각해보면 좀 과하고 별로인 느낌.

플로렌스 퓨는 최고다. 왜 박찬욱이 매혹 되었는지도 알겠고. 나조차도 이 드라마 끝까지 본 것이 그녀 때문이었으니.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빅 리틀 라이즈>와는 전혀 딴판의 모습으로 전혀 딴판의 간지를 내뿜는다. 존나 프로페셔널한데 은근히 수줍어하는 모습이 귀여움. 마이클 셰넌은 언제나처럼 묵직하게 연기해주고 있고. 연기 관련해서는 다 마음에 든다.

'배우'라는 직업, 그리고 '몰입'과 '연기'라는 부분들로 '여차하면 이중첩자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순간들'에 대해서 고찰한 것이 재미있다. 그렇다. 누구나 처음에는 한 쪽 편에만 서서 원웨이 티켓을 끊는다. 그것이 애국심 때문이었든, 그냥 흥미 때문이었든 간에. 그러나 적진에 침투해 적들과 동고동락하는 순간, 그들에게 몰입해버리는 순간 배신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가 그 점을 잡아 끄는 것 같아 썩 흥미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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