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1 17:22

데쓰 프루프, 2007 대여점 (구작)


타란티노가 익스플로테이션 영화에 바치는 애가. 원래는 절친인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까지 한데 묶어 <그라인드 하우스>라는 타이틀로 붙어있는 작품이다. 근데 나는 <플래닛 테러>보다 <데쓰 프루프>가 훨씬 더 좋거든. 둘 다 블루레이로 갖고 있지만 이번에는 그냥 <데쓰 프루프>만 다시 보기로 한다.

과거 싸구려 영화들의 흥취를 일부러 다시 만들어내려는 작품이다보니, 영화 곳곳에 그 흔적이 긁히고 묻어 있다. 뻔뻔하게 'MISSING REEL' 띄우고 중간 전개를 생략해 전반부 내내 말하던 '랩 댄스'를 맥거핀으로 만들어버리거나, 일부러 조잡하게 편집해낸 사운드 효과 등이 이상하게 잔재미를 준다. 따지고보면 별 것 없는데 익스플로테이션 영화 코스프레를 요상하게 해대니 그게 그냥 재밌게 느껴지는 경우. 존나 뭔 비디오 게임도 아니고 희대의 롤플레잉 무비네. 그 옛날의 구리구리한 영화 컨셉 잡고 막 만든 영화이니 롤플레잉 무비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다.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이 많이 떠오르는 구성이다. 초반부만 보면, '아, 이 여자들이 주인공이구나. 꽤 중요한 인물들이겠는 걸?' 싶어지지. 근데 타란티노는 금세 다 '치아라' 해버린다. 중요한 인물들처럼 소개해놓고 중반부에 그냥 다 리타이어 시켜버리는 패기. 타란티노의 영화적 관습을 모조리 다 깽판쳐놓는 실력은 하여간 알아줘야한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걸 이야기 했었다. '우연'이라는 게 얼마나 '악마' 같은 개념인지. 악마들은 왜 우연에 기댄 내기를 선호하는지. 그 관점에서 본다면 대부분의 공포 영화들도 다 마찬가지지. 묻지마 폭행, 묻지마 살인 같은 거 아니겠냐고. 주인공들이 얼마나 재수가 없었으면 왜 하필 저 살인마를 만났을까. 주인공들이 얼마나 재수가 없었으면 왜 하필 귀신 들린 집에 들어간 걸까. 주인공들이 얼마나 재수가 없었으면 왜 하필 저 히치하이커를 태웠을까- 등등. <데쓰 프루프>의 중반부도 그래보인다. 솔직히 커트 러셀이 연기한 스턴트맨 마이크, 그렇게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잖아. 얼굴의 상처가 꽤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긴 해도, 그 자체로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잖아. 근데 시발 그 인간이 미친 살인귀였다는 진실. 존나 재수없게도 하필 그 인간의 차에 올라탔다는 괴로운 진실. 물론 이건 타란티노 영화이니 그 자체를 꽤 리드미컬하고 재밌게 보여주고는 있다. 그래도 어쨌거나 재수 존나게 없어 보이는 건 사실이잖아.

근데 개 웃긴 게, 스턴트맨 마이크 역시 결국엔 재수가 옴 붙었다는 거다. 악마도 피해자가 될 상대를 잘못 선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전반부의 그 여자들이 재수가 없어 그와 엮였던 것처럼, 후반부의 스턴트맨 마이크는 재수가 없어 그녀들과 엮이게 된다. 시발 하필 죽이려고 달려들었던게 물불 가리지 않는 여전사 3인방이었을 줄 그가 어떻게 알았겠나. 돈 털려고 들어갔다가 거기서 밥 먹고 있던 강호동과 최홍만을 만난 강도가 된 격이다. 

별 것 아닌 걸로 장황하게 떠들다가, 결국 막판에는 마구 밀고들어오는 쾌감과 흥분으로 마감해버리는 영화. 마지막에 'The end' 뜨는데 거기서 환호성을 지르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커트 러셀 줘터지는 거 개웃김. 이 아저씨는 존나 멋있는데 존나 병신 같아. 그래서 좋아해. 

덧글

  • 로그온티어 2020/04/01 17:54 # 답글

    저는 이 영화를 타란티노판 페미니즘 영화라고 봤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옛날 B급 슬래셔 영화보면 미녀들이 약간 에로틱(?)하거나 과격하게 죽임당하는 장면들이 있잖아요. (가끔 도착적인 느낌으로 찍어재낀 씬도 볼 수 있고, 요즘 베이퍼웨이브 영향으로 옛날 비디오들 짜집기한 영상에서 주로 많이 나오죠. 카펜터 브루트가 뮤직비디오에서 잘 쓰는 방식이기도 하고) 전반부를 보면서 이런 영화들의 살인장면들이 떠올랐고, 이 영화 후반부를 보면서, 이런 씬들에 대해 보복한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여성캐릭터들이 커트러셀 앞에서 야릇한 춤을 추기도 하고, 커트러셀에게 말에 속아 넘어가기도 하는데, 여러모로 농락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허나 이후에 컬러 화면 (현대 시기) 으로 돌아올 때는 아예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카체이스를 하기도 하고 커트 러셀을 매섭게 추격하고 보복하기도 하고요.

    실제 영화에서는 안 나왔었지만 그동안 영화를 만드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여성 스턴트를 주연으로 내건 것도 그렇고, 보복씬도 그렇고, 장난끼 가득하지만 은근히 의도가 충만한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리얼 카체이스나 올드한 B급 영화에 대한 오마주도 충분해서 보는 맛이 약한 것도 아니고요. 단지, 그런 보는 맛 사이에 은근슬쩍 메세지를 집어넣은 거죠. 최근에 나온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가 영화 속에서 역사를 바꾸어 염병할 히피(?)들에게 보복했듯이, 이 영화는 장르영화 속에서 생각없이 소비된 여성 캐릭터들을 신경 쓴 영화적 보복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전에 리뷰 다시 할려고 준비했던 건데 갑자기 떠올라서 여기에 쓰게 되네요 (...) 제 생각에 타란티노 감독은 정말 PC함이 넘치는 감독이었다고 생각해요. 흑인문제를 스파게티 웨스턴에 뒤섞은 [장고:분노의 추격자]도 그렇고, 여성 주연을 내건 액션영화인 [킬빌]도 그렇고, 블랙익스플로이테이션인 [재키 브라운]도 그렇고. 근데 생각해보면, 타란티노 감독은 최고로 PC한(?) 감독인데 PC해 보이지 않다는 게 재밌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PC함의 기준에 맞춰져 있는 감독인데 그 누구도 그의 PC한 시선을 보지 못하는 거죠 (?) 왜냐하면 PC함은 있는데 그걸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그랬던 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좆나 병신같은건 타란티노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타란티노의 영화는 병신인 척 굴면서 자세를 낮춰서 관객의 머리 속으로 부드럽게 침투하는 데 능숙한 거지, (바보연기 처럼 말입니다.) 진짜 병신미를 드러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반면에 영화의 병신미에 심취한 건 로드리게즈라고 생각합니다. [마셰티]까지는 괜찮았는데 [마셰티 킬즈]보고 절규했던 기억이 (...) [알리타]는 괜찮았지만, 아직도 병신미학은 거기에 있으니까 로드리게즈는 절대로 방심하면 안되는 감독이에요!
  • CINEKOON 2020/04/09 23:56 #

    이 영화야말로 타란티노의 페미니즘 영화 맞죠. 그리고 로드리게즈가 병신미에 심취했다-라는 부분은 적극 동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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