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4 21:03

캐스트 어웨이, 2000 대여점 (구작)


자가격리를 비롯한 사회적 거리두기 끝판왕. 톰 아저씨의 짠내나는 무인도 표류기.

주인공인 톰 행크스의 척 놀랜드가, 원래는 시간 관념이 철저하다못해 과격할 정도로 과해서 몸을 뒤흔들 정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이 재미있다. 페덱스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아래 사람들에게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길길이 날뛰며 설파하는 놀랜드.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를 직시하고 있으니 그에 맞춰 빨리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바로 그랬던 그가 무인도에 떨어지고 나서는 영겁 같은 시간들을 혼자서 감내하게 된다. 택배가 맴피스에서 모스크바까지 오는 데에 87시간이나 걸렸으니 이는 굴욕적인 성과다-라고 말했던 이가 정작 무인도의 첫째날과 둘째날에 한 것은 멍 때린 것 밖에 없었다는 아이러니. <닥터 스트레인지>의 주인공도 그랬었다. 언제나 시간 강박 안에서 살던 남자가, 그를 사랑해준 여자에게 시계를 선물 받으며 시작되던 이야기. <캐스트 어웨이>의 척 놀랜드도 시간 강박에 살다 약혼녀에게 시계를 선물 받고는 무인도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니 그를 이 이야기의 선구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인도에서 벌어지는 표류기는 짠내나게 재미있다. 별 것 아닌데 재밌는 설정들이 흥을 돋구고 이야기에 푹 빠지게 한다. 페덱스 인장이 찍혀있는 택배 박스들 언박싱하는 장면은 진짜 재밌는 설정이다. 하나 하나 깔 때마다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 풀어보듯이 기대하게 되고, 별 것 아니었을지언정 나중에 그것들을 놀랜드가 기묘하게 써먹고 있는 걸 목도하게 되며 또 이상한 재미가 나옴. 하여튼 이것 외에도 스케이트 칼날로 치아 박살내는 장면이나 불 피우는 장면 같은 것들, 진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 영화 다시 본 게 거의 20여년 만인 것 같은데 진짜 몇몇 장면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더라고. 

마음 같아서는 런닝타임을 한 30여분 정도 더 늘려서 무인도 장면으로 꽉꽉 채웠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지금 버전도 충분히 재미있기는 하지만 시간의 생략이 좀 과감한 편이라, 런닝타임을 좀 더 늘려 무인도에 존재하던 상위 포식자랑 싸워 줘터지는 장면 같은 거 좀 더 있으면 어땠을까 싶음. 물론 다시 한 번 말해 지금 버전도 충분히 재미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무인도 표류기' 이상을 갖고 있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이 영화가, 무인도 표류기에 대해서는 정작 별 관심 없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 이야기의 진짜 중요한 부분은 무인도에 떨어지기 전과 그 섬을 탈출한 이후. 엄청난 일을 겪은 한 명의 인간은 어떻게 바뀌게 되는가-에 대해서 영화가 너무 잘 보여준다. 비단 그 인간의 심성이나 취향 뿐만이 아니라, 그 인간이 맺고 있던 사회적 관계들도 말이다. 일반적인 무인도 표류 영화였다면 주인공이 비행기에서 내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서 끝났겠지. 하지만 영화는 기어코 척과 그 약혼자였던 켈리의 이야기를 더 보여주고야 만다. 분명 중반부까지만 하더라도 무인도에서 개고생하며 불피우고 있는 주인공 모습을 보면서 '나라면 금방 불 피울 수 있었을까?' 싶었던 이야기가, 후반부에 이르면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로 변모하게 된다. 근데 또 척이나 켈리 입장이 모두 다 이해가 돼. 심지어는 켈리의 현 남편 입장도 이해가 되더라니까. 하여튼 정말 잘 쓴 이야기다.

톰 행크스는 정말로 기분좋게 젊은 상태였고, 원맨 쇼에 가까운 이 영화에서 제 몫을 다 해냈다. 그리고 로버트 저메키스. 당신이 3D 기술 이딴 것에 더 몰두하지만 않았더라면 정말로 좋은 필모그래피를 계속 쌓아갈 수 있었을텐데. 어릴 때는 정말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어쩌면, 영화의 신인 것이 아닐까-하는. <빽 투 더 퓨처> 시리즈부터 <포레스트 검프>와 <콘택트>를 거쳐 이 영화까지. 당시의 저메키스는 정말로 오락영화 접신의 경지에 있었다.

덧글

  • 로그온티어 2020/04/04 21:49 # 답글

    .........전 사회적 거리두기 끝판왕은 존 카펜터의 [더 씽]이라고 생각했는데요.......
  • CINEKOON 2020/04/09 23:54 #

    그건 육체적 + 심리적 거리두기의 최종보스이긴 하네요. 근데 로그온티어 님 요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제가 요즘 소식을 통 몰라서...
  • 2020/04/10 02:0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20/05/04 15:4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