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0 17:22

아버지의 깃발, 2006 대여점 (구작)


같은 감독의 작품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연작 구성으로 이오지마 전투를 다룬 영화.

영화의 첫 쇼트부터, 텅 빈 전쟁터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이미지가 시작된다. 결국 이건 전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기억들에 대한 영화인 거지. 사진처럼 남은 전쟁의 기억들로부터. 뭐, 대부분의 전쟁 영화들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전쟁 자체보다 그 후에 찾아오는 트라우마 등의 여파에 대해서 좀 더 집중적으로 다루는 영화다. 1944년 당시 이오지마에서 벌어졌던 전투, 그리고 성조기를 꽂고 채권팔이 이벤트에 징집되는 주요 인물 3인방의 미국 본토 유랑기, 마지막으로 주인공 중 하나인 존 닥 브래들리의 노후 시점. 이렇게 세가지 시점이 교차편집되며 돌아가는 영화다. 그러다보니 전투 그 자체를 묘사하는 부분도 크지만 그 이후 인물들의 이야기와 감정들이 굉장히 중요함. 

사람이 수 천명씩 죽어나가는 전쟁 장르 영화인데도, 사람 한 명 한 명을 죽일 때마다 느끼는 무게감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 아군으로 묘사되는 미국 병사들은 일본군에 의해 냉정하고 허무하게들 죽어나가지만, 우리의 주인공들이 일본군을 죽일 때마다는 굉장히 큰 방점을 찍어놓은 느낌. 닥이 부상병을 치료하다가 공격받아 죽였던 일본군은 잠시 앓다가 죽고, 또 헤이즈가 참호에서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일본군 역시 부르르 떨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둘 모두, 클로즈업으로 묘사된다는 점. 죽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하는 것이 전쟁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 한 명을 죽이는 것엔 엄청난 후폭풍이 뒤따른다는 것. 어쩌면 이스트우드는 그걸 잘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특히 헤이즈는 전쟁이 남긴 그 상흔 때문에 죽을 때까지 괴로워하는 것으로 묘사되니까. 왕년에 사람을 많이 죽여본 무법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런 묘사를 하다니 짐짓 우스워보이기도 하지만, 또 가만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랬던 그이기 때문에 이런 묘사들을 하는 것이 더 와닿는 지도 모르겠네. 폭력적 삶을 살았던 사람이 폭력적 삶에 대해서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전쟁의 낭만성을 제거하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수로 바다에 떨어진 병사를 구조하지도 않은채 그냥 떠나는 아군의 모습도 보이고, 심지어는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주요인물들 중 대부분이 전사한다. 이를 통해 우리 편이라고 해서 그들 역시 이상적인 군대인 것은 아니며, 그들이 내세웠던 정의와 애국심이라는 가치 역시 얼마나 가벼운 것들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게 또 프로파간다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그런 시점들이 잘 먹히는 것도 있음. 군인으로 지원했건만, 정작 군 채권팔이의 홍보용 도구로 여러 행사뛰기에 급급한 주인공들의 상황.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고, 특히 그런 남자친구를 이용해 유명세를 차지하려드는 것처럼 밖에 안 보이는 여자친구의 모습도 우습다. 더불어 전사했던 전우, 행크의 어머니 묘사. 진실 대신 위선을 보고도,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불편한 진실보다 편안한 거짓. 어쩌면, 바로 그것이 프로파간다가 추구하는 방향인 것 같기도 하네.

인디언에 대한 백인들의 시각이 달라질 것이며, 이제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헤이즈의 말. 누구도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는다. 레니 개그논의 말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유통기한 지난 어제의 영웅으로 전락하고 쓸쓸 씁쓸한 말년을 맞이하지 않나. 토사구팽 당한 영웅들. 그들에겐 이오지마 보다 미국 사회가 더 격렬한 전쟁터였던 것이다.

연출과 촬영적 측면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통해 스필버그가 우리를 지옥으로 직접 데려갔다면, 이스트우드는 우리에게 지옥을 그냥 있는 그대로 전시한다. 종종 전투기 파일럿들과 위생병의 시점으로 주관적인 광경을 보여주고, 또 핸드헬드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만 하여튼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그것에 비하면 좀 더 안정적이고 차분한 느낌. 전쟁 이후나 트라우마를 다루는 요즘의 영화들이 자주 쓰는 연출이기는 하지만, 카메라의 플래시나 불꽃놀이 빛을 통해 인물들의 PTSD를 자극하는 방식도 이 영화에서 참 잘 썼던 것 같고.

웃기는 이야기지만 역시 군대 이야기인지라, 까라면 까야지-라는 묘사가 일품. 장관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정상에 꽂은 성조기 기념품으로 달라 하니까 거기서부터 쭉 아래로 내리 갈굼 명령. 닐 맥도너의 표정이 진짜 웃긴다. 실제적인 공보다 허례허식 겉치레를 더 중시하는 군의 웃기는 짬뽕 같은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아 좋았음.

프로파간다의 서늘한 그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결말. 어찌보면 초반부에 배에서 떨어진 병사를 그냥 두고 가는 걸 보고, 어떤 이가 '누구도 두고 가지 않는다더니...'라고 말했던 것 자체가 그런 것 아니었겠나. '누구도 두고 가지 않는다'는 말 자체도 결국은 허황된 프로파간다일 뿐이었으니.

뱀발 -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미친 저격수, 빌리 페퍼가 나온다. 이 양반은 총 들었을 때가 가장 멋짐. 더불어 큰 역할은 아니지만 폴 워커도 등장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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