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3 12:47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2006 대여점 (구작)


같은 감독의 작품인 <아버지의 깃발>과 연작 구성으로 이오지마 전투를 다룬 영화.

<아버지의 깃발>이 전쟁으로부터 도망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흡사 '제 무덤 판다'라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주인공이 나중에 스스로가 묻히게 될지도 모를 참호를 끝없이 파내는 이미지로 시작된다. 이 당시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말이 이오지마 섬 사수지, 그냥 버리는 카드나 다름 없었던 섬 아닌가. 물론 전략적으로 중요하긴 했겠지만, 이미 전세가 기울대로 기운 상황에서 이 섬 쪼가리 하나 지켜봤자 본토가 침공 당하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었을 테니 말이다.

<고지전>의 결말부와도 좀 비슷한 감흥을 주는 영화인데, 일본군 입장에서도 이 이오지마라는 섬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 상술했듯 전략적 요충지였을 수는 있으나 전쟁통에 논밭을 가꿀 수 있는 상황의 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자연경관이 빼어난 것도 아닌 그냥 밋밋한 작은 섬. 주인공부터가 이야기하잖아, 이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섬 미국에 줘버리고 집에 가자고. 웬만한 지휘관 장성들도 부임하기를 꺼려하는 염병할 섬이 바로 이 곳 이오지마였던 것이다.

같은 감독에 연작 구성인지라 자꾸 <아버지의 깃발>과 비교하며 보게 되는데, 그 영화가 '우리가 대체 무얼 위해 싸웠는가'에 대한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우리는 대체 무얼 위해 싸우고 있는가'의 영화처럼 보인다. 과거형과 현재진행형의 차이. 아무래도 <아버지의 깃발>은 전쟁 이후에 느끼는 환멸이 주된 감정이었고,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비록 오프닝으로 현재 시점이 나오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전투 그 자체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들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리라. 지휘관인 쿠리야바시는 일본 제국 사령부가 우매한 국민들 뿐만 아니라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자신들마저 속이고 있다 생각하게 되고, 니시 중좌와의 대화에서 그들은 차라리 섬을 바닷속으로 가라앉히는 것이 나을 거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만큼 이 전투 자체가 최일선의 지휘관들에게마저 의미없는 자살 임무처럼 보였던 것.

당시 일본군의 미친 문화가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시발 이 새끼들 할복하는 건 진짜 봐도 봐도... 카미카제 같은 자살 공격도 웃기는데 내가 진짜 그것까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다. 존나 코너에 몰리고 난감한 상황이면 뭐라도 해보고 죽자-라는 생각?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전투에서 지게 생기니까 자기 포함해서 부하들까지 다 자살하기를 강요해? 이런 시발... 그래... 너네 천황 폐하 만세 외치는 것도 알겠고, 너네가 천황 폐하의 명예로운 군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 알겠어... 그럼 나가서 명예롭게 싸우라고. 아니면 항복을 하던가. 뭔 말 같지도 않은 자살 감행이야, 사람 귀한지도 모르고 시발. 븅신 같은 새끼들. 자살하지 말라는 지휘관 명령도 안 듣고 적당히 중간 선에서 자살 종용이네. 진짜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할복 묘사는 볼 때마다 골 때리는 것 같다.

하여튼 수류탄으로 어레인지된 할복 묘사 외에도, 당시 일본의 육군과 해군 사이 알력에 대해서나 일본군 특유의 기질과 문화 등 타국의 감독이 만들었다기엔 디테일한 묘사들이 눈에 띈다. 물론 이스트우드가 혼자 알아서 다 했던 것은 아니겠지만, 하여튼 대단한 부분인 건 맞지. 서양의, 심지어 적국이었던 나라의 감독이 이 정도로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가 좀 믿기지 않기도 한다.

거의 흑백 영화와도 같은 톤이 인상적이다. 분명 컬러 영화이기는 한데, 당시의 이오지마 상황 자체가 좀 무채색의 기질이 있었고 색보정 역시도 채도를 많이 뺀 느낌. 콘트라스트가 두드러져서 좀 고전적인 느낌도 난다.

전체주의, 군국주의는 빵집을 운영하고 있던 주인공 부부에게 전쟁 물자라는 핑계를 대며 빵을 가져간다. 나중에는 철이 필요하다며 빵 굽는 기계들을 가져간다. 그리고 정말 나중에, 이제는 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그들은 빵집의 남편을 데려간다. 군국주의에게는 인간도 전쟁 물자일 뿐이다.

더불어서 <7인의 사무라이>와 좀 비슷한 기조를 갖고 있기도 한 것 같다. 사무라이들은 보통 명예나 보상을 위해 싸우지만, 그 영화에서도 결국 진정으로 이기는 것은 농민들이었다. 전쟁과 수탈에 지긋지긋하도록 당한 농민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그 대목이 생각나는 건, 나카무라 시도가 연기한 이토 중령이 부하들에게 자살 돌격을 나직하게 추천할 때였다. 자기 혼자서는 명예로운 일인척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자살 공격을 감행하겠다 하지만, 정작 그 밑에 있던 부하들은 뒤돌아서며 '작작 좀 해', '지긋지긋하다' 등의 말을 내뱉는다. 높으신 분들은 이 모든 게 명예로운 줄 알지만, 실상 일선에 나가 싸우는 아래의 사람들은 이 모든 게 지겨울 뿐인 것이다. 

자신의 신념과 국가의 신념이 일치하는가. 젊은 시절 미국에서의 쿠리바야시는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지금 이오지마의 쿠리바야시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 대답을 대신한다. 그리고, 그냥 편지를 쓴다. 이야기를 전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행위, 편지. 편지를 쓰고, 편지를 읽고, 심지어는 편지를 낭독하는 것으로써 전쟁터 한 가운데에서의 인간애를 말하는 영화. 니시 중좌가 읽는 미군 샘 어머니의 편지는, 그렇게 결국 일본군이 받은 편지가 되었다.

나를 구할 약을 적군에게 대신 쓰는 것. 적군의 편지를 대신 받는 것. 이스트우드는 전쟁터 한 가운데에서조차 '인간'의 존재를 잊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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