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7 12:57

스파이 지니어스 극장전 (신작)


지상 최고의 스파이가, 지상 최고의 아군 천재에 의해 한낯 비둘기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된다는 설정. 아니, 비둘기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비둘기 되는 영화였지. 

희대의 트롤러이자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주인공인 영화였다고도 할 수 있다. 최고로 혐오스러운 상황 아니냐? 비둘기로 변하다니. <플라이>급으로 혐오스러운 변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여튼 이 트랜스폼 약물을 개발한 천재 주인공이 극단적인 이상주의자라 존나 꼴보기가 싫다. 애니메이션이니까 표현과 묘사에 있어 충분히 이해되는 측면이 있고, 꼭 애니메이션이 아니더라도 이상주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니 마냥 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애새끼는 좀 정도가 심하다.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첩보 세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일절 상의도 없이 비살상무기를 남몰래 쥐어주는 건 범죄 아니냐? 그러다 진짜 사람 죽으면 어쩌려고.

주인공의 직업이 첩보원이다보니, 다른 에스피오나지 장르 영화들 패러디가 많이 나온다. 특히 제임스 본드 패러디. 음악도 본드풍이고, 후반부 인간으로 돌아온 랜스의 얼굴에 빛이 묻는 방식은 딱 <스카이폴>의 그것. 정보국 국장도 흰머리의 여성이던데, 이건 주디 덴치의 M 영향을 받은 것일까. 뭐, 꼭 <007>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에스피오나지 장르물의 클리셰 대부분을 가져다가 갖고 노는 영화이긴 하다. 조직 내부로부터 오해를 사 누명을 쓰고 도망다닌다는 주인공의 상황부터가 그렇지. 에필로그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느낌 이빠이고. 

드론을 활용하는 악당이라는 점과 주요 배경으로 베니스가 등장한다는 데에서는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이 떠오르기도 한다. 게다가 주인공 목소리는 또 톰 홀랜드 아닌가. 그리고 워싱턴 DC에 위치한 비밀 정보 기관이 주요 인사 목록을 탑재한 드론들에게 공격받는다는 설정은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의 프로젝트 인사이트 생각남. 아, 악당은 또 주인공과 과거가 얽힌 기계팔의 남자잖아?

클라이막스가 심각할 정도로 유치하고 맥 빠진다는 게 좀 치명적이다. 다른 부분들은 좀 지루하고 밍밍하더라도 그럭저럭 볼 만한데, 유독 클라이막스가 좀 처지는 느낌. 고양이 반짝이로 전 세계의 운명을 쇼부친다니, 존나 나이브한 설정이야. 그와중에 새끼 고양이 보며 헤롱거리는 메인 빌런의 모습이 그나마 코미디.

그래도 이 영화 통 틀어서 제일 웃긴 건 윌 스미스의 존나 사악한 웃음이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중간에 천재 꼬마 해코지하는 상상하면서 악당처럼 웃어제끼는데 그게 진짜 존나 웃김. 이 영화의 유일한 내 웃음 벨이었음.

하다하다 이젠 3D 애니메이션에서까지 동양인을 비열한 악당으로 만들고 있네. 일본인들이 악당으로 나오는 것 자체는 괜찮은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너무 멍청하고 야비하게 나온다. 호텔 로비에서 다른 민간인들 조롱하고 괴롭히는 묘사까지는 안 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굳이 또 이렇게 동아시아인에 대한 또다른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 필요가......

하여튼 쾌활한 묘사와 리드미컬한 변주가 좋고, 특정 캐릭터들의 매력이 잘 살아 있는 영화인 것은 맞다. 다만 그 이상이 없는 밋밋한 영화일 뿐. 굳이 주인공이 비둘기 폼을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그냥 우정 때문인 거잖아, 솔직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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