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6 15:08

봄날은 간다, 2001 대여점 (구작)


봄바람 솔솔 불어오는 계절에, 정작 봄이 떠나는 영화를 다시 보게 되다니.


스포가 온다.


계절을 사랑, 연애와 붙여 묘사하는 영화들이 많다. 애초 제목부터 그랬던 <500일의 썸머>처럼. 그리고 이 영화에서 이영애가 연기한 은수는, <500일의 썸머>에서 주이 디샤넬이 연기했던 썸머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물론 나온 순서대로만 하면 이쪽이 먼저지만. 하여튼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이기에, 두 영화 속 남자 주인공들에게 이입하느라 두 영화 속 여자 주인공들을 좀 얄밉게 보았다. 물론 은수의 마음과 상태가 어떤지는 대략적으로나마 알아. 하지만 그럼에도 용서 안 되는 부분들이 있는 거다. 

일단 은수는 이미 한 번의 결혼을 실패한 이력이 있고, 때문에 묵은지처럼 깊고 오래가는 사랑보다는 컵라면처럼 가볍고 부담없는 인스턴트 사랑을 더 추구하는 여자다. 때문에 반대로 묵은지 같은 사랑을 원해서 "은수 씨는 내가 라면으로 보여?"라고 은수에게 일갈하는 상우 입장에서야, 그런 은수가 이해되지 않겠지. 허나 어찌되었든 은수는 사랑에 실패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가족을 만나볼 것을 은근슬쩍 종용하는 상우에게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은수의 마음과 그로인해 내린 그녀의 결정에는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최소한 이해는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은수가 얄미운 점은, 언제나 자기 감정이 우선이라는 것. 그리고 상대에게 너무 여지를 준다는 것. 한마디로 지나치게 꼬리를 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자기가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진다. 항상 자기가 우선이다. 그래서 그녀는 상우에게 한 달간 시간을 갖자-라고 말하며 이별을 유예하지만, 그 한 달의 시간동안 다른 남자로 상우를 대체한다. 딱 잘라 헤어진 것도 아니고, 여지를 겁나 남겼으면서 그와중에 또 바람핀 거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얄미운 건... 영화의 결말부. 힘겹게 마음 정리를 끝낸 상우의 앞에 불현듯 나타나, 그가 부드럽게 거절 의사를 보였음에도 끝까지 뒤돌아보며 여지를 남긴 것. 아무래도 그게 더 얄미움. 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로 여자 주인공부터 까고 앉아있는 모양새가 어째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멜로는 다른 장르 영화들보다 공감의 힘에 더 애쓰는 장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자인 나로서는 이런 이야기로 서두를 채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부분들을 차치하고 본다면, 영화는 정말 잘 만들어졌다. 촬영과 조명을 비롯한 연출이 참 좋은 영화. 대한민국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예쁘고 우아하게 담아낸 것만으로도 눈요기를 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테크닉. 영화가 상우만을 담는 초반, 카메라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잘 움직이지 않는다. 고정된 카메라 앵글로 그저 상우의 동선을 찬찬히 쫓을 뿐. 그러나 은수가 상우의 삶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상우가 은수에게 마음의 동요를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카메라가 부드럽게 움직인다. 뻣뻣하게 고정되어 있던 사람의 마음과 그 삶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은 결국 사랑이었던 것이다.

상우와 함께 사는 노년의 할머니. 그녀는 이미 사별한 남편의 젊은 시절은 그리워하지만, 바람나 스스로를 떠난 시점 이후의 남편 시절은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을 사랑해주던 남편'이 자신에게 돌아올거라 생각하며 매일 같은 시간 수색역으로 향한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평생동안 기다리고 있는 그녀. 이에 대해 상우는 고모에게 묻는다. '왜 할아버지는 바람 피웠대?' 

할머니는 결국 상우의 미래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상우는 곧 그의 할머니였다. 바람나 마음이 떠버린 은수를 오매불망하며 기다렸던 상우의 시간들. 상우가 마음을 정리하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그의 할머니처럼 될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뒤늦게나마 느끼고 깨달은 상우가, 은수를 향해 애닳던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어쩌면, 할머니 덕분이었을지도.

이렇게 각본도 좋고 연출도 좋지만, 유지태와 이영애라는 두 배우의 빛나게 젊던 시절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영화. 정말이지 그들의 청춘이 이 영화에 새겨져 있구나. 

뱀발 - '권위 없는 역할' 권위자, 이문식 배우가 나왔었구나. 이번에도 여전히 권위 없는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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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D U MISS ME ? : 새콤달콤 2021-06-11 16:12:26 #

    ... 반의 당연한 귀여움을 거치고 나면, 영화가 담아내는 것은 결국 또 '사랑의 과정'이다. 사랑을 다루는 멜로, 로맨스, 로맨틱 코미디 장르들은 그들 중 대개가 모두 이 '사랑의 과정'을 담느라 바쁘다. 설레고 떨리는 연애의 시작과 그 초반, 이어 풋풋하고 단내 나는 중반을 지나고나면 찾아오는 싫증과 권태의 후반까지. 대부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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