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2 14:14

네고시에이터, 1998 대여점 (구작)



1990년대 끝물을 장렬하게 태웠던 액션 스릴러. 아직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 이거 하나를 못 보고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네고시에이터>야말로 F 게리 그레이의 최고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량의 스포일러!


인질범과 협상가의 대결 구도를 담은 다른 영화들은 많았지만, 그 모든 영화들의 원전이라 부를 만한 교과서적 구성이 눈에 띈다. 인질범을 주인공으로 두든 악당으로 두든 간에 왜 이 인물이 이런 일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영화가 잘 설명해야 한다. 근데 <네고시에이터>의 인질범은 원래 '인질범들과 대치하는 협상가'였던 사람이다. 한마디로 실력 출중한 경찰이었다는 것. 영화는 이 인물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지 등에 대해서 나름 심도 있게 묘사한다. 근데 또 막 말을 질질 끌지는 않아. 콤팩트한 초반부 사건 하나로 능력 보여주고, 이후 몇 개의 씬들을 통해 누명의 과정을 가볍게 묘사함. 그 묵직하면서도 가볍고 날랜 경공술이 좋다.

그렇게 사무엘 L 잭슨이 연기한 '인질범이 된 협상가' 캐릭터의 여정을 중요하게 다루다 보니, 투 탑 영화임에도 케빈 스페이시가 연기한 '크리스 새비언'의 등장은 다소 늦는 편. 영화 시작하고 40분이 넘어가서야 그가 등장한다. 근데 이 캐릭터의 소개도 아주 좋고 친절하다. 이미 다른 인질범과 대치하고 있는 협상가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사무엘 L 잭슨의 '대니 로맨'으로 한 번 보여주었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비슷한 상황으로 크리스 새비언을 소개했더라면 다소 물렸을 텐데, 영화는 크리스 새비언이 아내와 딸 사이를 장난스럽게 중재하는 모습으로 그를 소개한다. 협상 능력도 능력이지만, 여유와 인간애의 한 측면을 매끄럽게 잘 보여주었다는 데에서 큰 가산점. 어차피 이 인물은 뒤에 가서 대니 로맨을 도와주게되니 말이다.

캐릭터와 미리 다져놓은 설정을 잘 요리했으니, 이후부터는 파죽지세다. 원래 인질 상황이라는 게, 별 양념 안 쳐도 그 자체로 긴장감 쭉쭉 뽑아먹을 수 있는 거라. 근데 영화가 또 미리 해두어야 했던 것들을 워낙 잘 해놓았으니 그 이후부터는 별 문제 없지. 존나 매력적으로 그려놓은 두 캐릭터를 그냥 갖다 붙여놓고 그거 구경만 하면 되는 건데.

인질범을 다루는 영화답게 스톡홀름 신드롬이나 리마 신드롬에 대해서도 가볍게 언급하는 편. 특히 대니 로맨에게 붙잡힌 인질들이 겪는 스톡홀름 신드롬 묘사가 재미있다. 처음에는 그냥 살려달라고, 여기서 나가게만 해달라고 빌던 자들이 어느새 대니 로맨의 편에 서서 그를 위해 입 다물고 있는 걸 보면 인간이 느끼는 감정 이입이라는 게 참 대단하고도 무서운 거구나 싶기도 하고. 물론 이 영화에서의 인질범은 그리 나쁜 놈이 아니었으니 다행이었지만.

대니 로맨이 부스터 밟는 순간의 묘사가 벙찌도록 재미있다. 다른 영화들에서 등장하는 보통의 인질범들이라면, 어느 정도 계획을 세우고 마음을 다잡은 뒤에 인질을 붙잡잖아. 근데 대니 로맨은 이 모든 것들이 다 즉흥적이면서도 감정적이다. 이 인간은 애초에 인질잡이 하려고 계획 세워둔 것도 없었고, 그저 자신의 억울함을 따지러 내사과 건물에 들어선 것이었을 뿐이다. 근데 자신을 엿 먹인 게 분명한 씹새끼들이 언성 높이고 밀치니까 홧김에 총 빼앗음. 그리고 총 빼앗은 김에 인질잡이로 돌입. 사실 <인사이드 맨>처럼 멋드러진 인질잡이는 다 영화 속에만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실제로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네고시에이터>처럼 시작할 것 같았다, 왠지.

캐스팅을 잘 이용한 영화이기도 한데, 사무엘 L 잭슨과 케빈 스페이시의 연기야 두 말 하면 입 아프니 그걸 굳이 콕 집어서 말하고 싶지는 않고. 경찰 내부에 악당들이 있다-라는 컨셉인데, 반장인 트래비스와 지휘관인 아담이 엄청 설치잖아. 근데 캐스팅이 <더 록>에서의 그 양반들이야. <더 록>이 1996년도 영화니까 <네고시에이터>보다 3년 정도 빠르다. 당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던 관객들은 아마 그 둘을 의심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 둘 다 <더 록>에서 시정잡배 악역들이었으니. 그런 부분에서 캐스팅이 자체적으로 반전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여튼 존나 재밌는 영화다. 매번 말하는 거지만 개인적으로 8,90년대 할리우드 액션 영화들에 대해 애정이 좀 남달라서 더 그렇게 느껴짐. 거의 15여년 만에 재관람했던 건데 이미 결말 다 알고있는 영화임에도 손에 땀을 쥐며 봤다. 요즘은 왜 이런 영화가 안 나오는 거야.

뱀발 - 케빈 스페이시의 마지막 기지는 <LA 컨피덴셜>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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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굴 데려다놓을 건데? 여기서 신의 한 수라고 여겨지는 게, 다른 사람도 아닌 사무엘 L 잭슨을 데려왔다는 것이다. &lt;롱키스 굿나잇&gt;도 그랬고 &lt;네고시에이터&gt;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양반은 어디 갖다놔도 웬만해선 중간 이상 가게끔 만들어주는 위인이다. 할리우드 최강의 깝죽이 곁에 할리우드 최강의 욕쟁이를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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