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상 포맷은 얼티밋 컷.
런닝타임만 놓고 봐도 3시간 30분 정도가 되는 대작. 수퍼히어로 장르계의 <블레이드 러너>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블레이드 러너>랑 공통점이 꽤 많거든. 가공할만한 원작이 있었다는 것부터가 똑같고,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물든 암울한 세계관을 추적추적한 비주얼로 구현해냈다는 것 역시 비슷하다. 그러나 역시 제일 비슷한 건 극장에서 망했다는 점이겠지. 두 영화 모두 극장에서의 수입은 별로 좋지 않았으나 이후 공개된 감독판과 각각 '파이널 컷'과 '얼티밋 컷'으로 명명된 추가 확장판으로 기존의 평가를 뒤집었다는 것. 그렇게 결국 전설로 남았다는 것. 참으로 신기하기만한 평행이론이다.
수퍼히어로 장르에 범람하는 이른바 평행우주 또는 대체역사 설정을 현실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영화라고 생각된다. '그냥 다른 차원에 그러한 일들이 있었다'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우리의 세계인데도 단지 초월적 존재들이 등장함으로써 역사에 수많은 다른 변곡점들이 생겨났다는 이야기. 실사 영화 기준으로만 놓고 본다면, 수퍼맨이든 배트맨이든 간에 그들이 역사 속 실제 사건들을 뒤집었던 경우는 없지 않았나. 수퍼맨은 수많은 외계인의 침공들을 막아냈지만 정작 그가 9/11 테러를 저지 했다고 묘사하는 영화는 없다. 배트맨은 수많은 살인과 방화를 막아왔지만 정작 그가 찰스 맨슨과 테드 번디를 체포했다고 묘사하는 영화 역시도 없다. 원작 코믹북 속에서는 별 이야기가 다 있었지만, 정작 실사 영화화 된 이후로는 타란티노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역사를 개변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왓치맨>은 수퍼히어로 실사 영화계에서 큰 힘을 갖는다. 거대화한 닥터 맨해튼이 베트콩들을 터뜨려 죽이는 장면, 실제 역사와 달리 닉슨이 세 번이나 연임하는 데에 성공한 장면 등. 초월적 존재들이 등장함으로 인해 그를 계기로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들이 전부 뒤틀려 버린다. 그걸 보는 잔재미가 크다.
요즘 MCU가 잘하고 있는 '원작의 현대화'. 주인공의 촌스러운 유니폼들을 전부 현대적으로 개량 한다거나 하는. 그건 그거대로 좋지만, <왓치맨>의 대쪽같은 올곧음 역시 묘하게 매력있다. 물론 원작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결말 묘사 같은 것들이 특히 그렇지. 그러나 그 외 디자인적인 측면에서는 그냥 화끈하게 밀어붙였다. 잭 스나이더 최고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가 특히 그렇다. 제아무리 과거의 수퍼히어로들이라고해도 그 촌스러운 복장들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 근데 그게 오히려 더 향수에 젖게 만든다는 점. 듣기로는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프로젝트를 지휘했을 적에, 영화의 시간적 배경을 비교적 현대인 2000년대 초반으로 옮기려 했었다고 들었다. 그건 그거대로 또 매력 있었겠지만, 어쨌든 간에 <왓치맨>은 이 시대가 딱 맞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워낙 지금 버전의 프로덕션 디자인이 잘 되어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수퍼히어로 장르에서 주로 다루는 딜레마들이 있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바통을 이어받아 죄와 벌의 인과론적인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에 이어 무분별한 자유와 무조건적인 통제 사이의 딜레마를 논했다. <맨 오브 스틸>은 <멋진 신세계>가 던져놓은 운명론과 자유의지에 대한 화두를 짧게나마 언급 했었지. 그 점에서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수퍼히어로 영화와 주제적으로 짝을 짓는다면, <왓치맨>은 <다크 나이트>와 이어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불편한 진실과 편안한 거짓 중 후자를 택함으로써 얻어진 짧은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니까. 다만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은 본인의 선택으로 스스로를 희생해 거짓된 평화를 이룩한 것인데, 이에 반해 <왓치맨>의 오지맨디아스는 상황이 좀 다르다. 배트맨의 선택과 희생, 그리고 그를 지원하는 고든의 실천이 <다크 나이트>에는 존재했다. 딱 그 둘이 만든 평화였다고. 허나 <왓치맨>에는 관련자가 다섯명이나 있다. 역할도 다 다르다. 오지맨디아스는 이 모든 계획을 설계했다. 결과론적으로는 평화를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옛 동료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에게는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근데 존나 웃긴 게 죄의식은 별로 없음. 아니, 있는 것처럼 묘사 되기는 하는데 그냥 다 척하는 것 같아서 꼴불견. 그리고 오지맨디아스의 이 계획을 가능케한 닥터 맨해튼의 존재. 그는 짐짓 스스로를 희생하는 성자처럼 보이지만, 이 거짓으로 이룩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그 역시 사람을 죽인다. 그도 감시자로서는 영 빵점인 것이다. 여기에 2대 나이트 아울과 2대 실크 스펙터 역시 방조 혐의를 띈다. 물론 앞선 둘에 비해 죄의식도 있었고 정의감도 충만 했지만, 하여튼 그럼에도 이 모든 실체를 사람들에게 공표하지 않았다. 닥터 맨해튼에 의해 인수분해 되는 것이 두려웠을 수도 있고, 아니면 말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무력감에 쩔었을 수도 있고. 하여간에 방조한 것 자체는 팩트.
그리고 로어셰크가 있다. 본인의 죽음 앞에서도 일말의 타협을 하지 않았던. 오직 그만이, 진정한 감시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채, 주관적인 신념을 토대로 객관적인 사실을 바라보는 사람. 때로는 잔인하고 포악하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민중의 편에 서려는 사람. 끝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사람. 그 신념을 버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일갈하는 사람. 그런 점들로 보자면, 로어셰크는 가히 최고의 감시자다. 그리고 이 영화 속 유일한 영웅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비 덴트가 말했지, 영웅으로 죽든지 아니면 오래 살아남아 악당이 되든지라고. 닥터 맨해튼이 그를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았어도 그는 결국 악당으로 오해받았을 것이다. 이미 현 시점에서도 탈옥범이었고, 이 모든 진실을 밝혀내도 그 역시 오지맨디아스나 닥터 맨해튼과 같은 '왓치맨' 소속이었으니 욕 더럽게 쳐먹다가 죽었겠지. 어쩌면 이왕 이렇게 된 거, 그가 그렇게 죽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지기도 하고. 존나 아이러니네.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 검은 수송선 부분은 이번 기회에 처음 보았는데,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이야기가 명명백백하고 전형적이라, 주인공이 그냥 덜 떨어진 놈으로 밖에 안 보이더라. 제아무리 미쳤어도 상상력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냐고. 하여튼 미친 상태에서 가족이나 친구를 적으로 오해해 죽이고 죽도록 후회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이미 많기 때문에 별로 새로운 느낌은 없었음. 그 자체로 오지맨디아스의 계획과 맞물려 돌아가는 스토리라인인 것은 맞지만.
원작의 이야기가 워낙 그 자체로 훌륭해 각색만 평균 이상으로 해냈으면 되는 영화였다. 때문에 오직 중요한 건 비주얼이었을 뿐. 바로 그런 의미에서, 다른 감독도 아니고 잭 스나이더가 이 영화를 연출했음에 감사한다. 요즘 그의 행보를 보면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지만, 그럼에도 <왓치맨> 속 그의 연출은 상상 그 이상이였다. 비주얼로 조지고 부시는 데에 특화된 잭 스나이더의 연출이 빛을 발하는 영화. 극장판보다 확장판이 더 좋은 비운의 영화. 이쯤되면 진짜 수퍼히어로 장르계의 <블레이드 러너>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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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HG 2020/05/04 11:43 # 삭제 답글
CINEKOON 2020/05/04 15: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