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의 50주년 기념작. 그리고 샘 멘데즈의 기념비적인 첫 블록버스터.
샘 멘데즈 + 로저 디킨스 조합을 제대로 각인시켜 버린 오프닝이 뛰어나다. 심지어 그 오프닝이라는 게 순서상 가장 첫번째로 오는 씬의 전체를 말하는 것도 아님. 그냥 영화의 첫 쇼트부터 모든 게 설명된다. 고정된 프레임에 은은하게 역광 처리된 조명. 그리고 등장하는 한 남자. 역광 때문에 카메라로 다가오는 내내 그의 정체는 뚜렷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마킹 포인트에 멈춰 서자마자 그의 얼굴로 스며드는 측광. 드러나는 제임스 본드의 얼굴. 아-, 첫 쇼트부터 이래버리면 할 말이 더는 필요하지 않은 거다. 이 쇼트 최근에 <스파이 지니어스>에서 오마주 했던 것도 재미있었는데.
이 영화 이전 스물 두편의 시리즈가 있었음에도, 제임스 본드의 과거사에 이토록 집착했던 영화는 없었다. 이 모든 게 다 샘 멘데즈의 취향과 해석이렷다. 그의 영화엔 항상 '집' 또는 '고향'의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보여지거나 간접적으로 인용되고, 극중 인물들은 모두 그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뛰었다. <스카이폴>도 마찬가지. 유사모자 관계를 이룬 M과 제임스 본드. 그들이 마침내 당도한 곳은 제임스 본드가 친부모를 잃고 그의 소년기에 안녕을 고했던 옛 집이었다. 감독의 취향이 이토록 중요하다. 작가주의 영화의 대표 사례로 들 수 있을 것 같은 영화.
모든 시리즈물이 다 그렇지만, 특히나 전체 시리즈와 시대적 맥락 안에서 읽으면 읽을수록 더 재미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일단 영화적으로는 '왕좌를 내놓은지 오래된 과거의 인기작'으로써의 해석이 있다. 첩보 블록버스터의 본좌로 군림한지도 거의 40여년이 흘렀지만, 그 자리를 제이슨 본이나 이단 헌트 같은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빼앗긴 것도 벌써 십수년 전 일 아닌가. 게다가 수퍼히어로나 스페이스 오페라 같은 타 장르 영화들에게 에스피오나지 장르 자체가 밀린지도 꽤 오래됐고 말이다.
여기에 역사적인 맥락도 불쑥 들어온다. 유난히 시리즈의 국적을 강조하는 태도.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의 그런 태도 자체가 이른바 '저물어가는 태양'인 영국을 응원하는 스탠스 역시 취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모두가, 이제 이러한 구시대적 첩보 영웅 놀이를 그만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는 빠르게 변하고 있고, 예전만큼 위험한 시대가 아니기에 MI6를 비롯한 비밀기관들의 활동을 축소해야한다고 떠들어댄다. 하지만 <스카이폴>은 M의 입을 빌어, 오히려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더 전통적인 방법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 태도가 가장 정점을 이루는 장면이 바로 M의 청문회 중 시 낭송 장면.
생각해보면, 이스탄불에서 벌어지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MI6는 참 여러 민폐들을 저질렀다. 세상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길거리에서 총을 쏘았고, 그들 때문에 현지 경찰들이 죽는 것을 지켜봤으며, 기차 객실 파괴에 민간인들의 자동차까지 죄다 파손 시켰다. 시장바닥의 과일 장수 트럭 치는 건 이 계열 장르의 클리셰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말이다.
근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게 좀 웃긴 거다. 이런 트랜드가 사실 좀 오래된 거잖나. 21세기 영화로써는 주인공들의 도덕관념을 유지시켜주며 그 모든 역할들을 악당들에게 몰아주는 것이 더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샘 멘데즈는 영국의 주인공 무리가 남의 나라에 가서 얼마나 깽판을 쳐놓는지. 그걸 아주 상세하게 묘사 하고야 만다.
이런 맥락들이 뒤엉키면서 더더욱 과거와 현재의 영국에 대해 들여다보는 영화인 것처럼 느껴지는 거다. 대영제국, 과거엔 존나 찬란했지. 전세계의 1/3 영토를 땅따먹기 해서 말그대로 잘 먹고 잘 살았지. 이역만리 남의 나라 가서 착취도 존나게 하고 말이야. 근데 지금은 그 주도권을 미국과 중국에게 빼앗기고 있지 않나. 영화가 이 현실을 메타로 보여주는 것 같아 더 재밌었음.
캐릭터 개개인과 그 사이 관계들까지 빌드가 진짜 잘 됐다. M은 이번 영화의 진짜 본드걸이자 '엄마'가 됐고, 제임스 본드와 라울 실바는 그 아래에서 더 사랑받기 위해 경쟁하는 아들들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라울 실바는 제임스 본드의 얼터 에고라는 점. 서로 비슷한 출신 성분과 능력을 갖고 있는 호적수인데, 제임스 본드 입장에서는 라울 실바가 다른 평행 세계의 '잘못된 나'처럼 보이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러니 더불어 동정도 들겠지, M이 얼마나 냉정한 여자이자 상관인지 이미 이스탄불에서 목격 했으니 말야. 자신이 소모품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깨달았으니 그렇게 몇 달 간 죽어 지낸 것이기도 했고.
때문에 제임스 본드에게 있어서 라울 실바와의 싸움은, 자기 자신과 대적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에서도 그게 잘 드러나 있지 않나. 자신의 그림자,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끊임없이 총을 겨누는 제임스 본드의 모습으로. 중간엔 아예 그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는 라울 실바의 모습까지.
후반부 액션의 규모가 미니멀 해진다는 것은 큰 단점이지만, 그럼에도 <나홀로 집에>식으로 변주한 트랩 액션의 아기자기함이 볼만하다. 그리고 이쯤되면 어차피 거대한 폭발이나 화려한 다찌마리로 보는 영화가 아닌 거지. 존나 켜켜히 쌓인 감정들만으로도 충분히 볼만한 영화인 거지. 하여튼 이 정도면 진짜로 시리즈를 부활시킨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다음편을 그렇게 말아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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