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이리언> 아류였던 <딥식스>나 <딥라이징>을 굳이 한 번 더 우려낸 사골 크리쳐 영화인 줄 알았지. 근데 결국에는 '거기'까지 가더라. 이건 예상 못했다.
언더스포!
시작하자마자 존나게 뛰는 시원한 전개가 일품. 배경 설정 설명을 그냥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로 때워버리고 본편 시작하자마자 해저 기지 빠그라지는 재난으로 돌격해버리는 상남자 영화 되시겠다. 그럼에도 써머리를 잘한 영화란 생각이 드는 게, 그 짧은 와중에 주인공 소개는 나름대로 잘 해낸다. 조금 뻔한 내레이션과 연출이었다는 점이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종류의 장르 영화에서 런닝타임 경제적으로 쓰려는 태도는 칭찬할 만한 일이지.
하여튼 설정 설명 때워, 주인공 소개 해치워, 그리고 바로 본격 재난 장면으로 직진. 이와중에 한 명씩 등장하는 조연진들은 두루뭉술하게 할 것 없이 그냥 깔끔하게 성격 보여주고 주인공 옆에 나란히 세운다. 감독 성격이 존나 급한가 보다. 틀림없다. 근데 매번 말하지만, 영화든 드라마든 전개 존나 질질 끄는 것보다는 차라리 빠른 게 훨씬 낫다. 괜찮은 선택이다.
미지의 공간에서 벌어진 괴생명체와의 조우. 보통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그 괴생명체의 기원을 둘 중 하나로 푼다. 1번은 '태고적부터 원래 있었던 존재'로 푸는 것. 그리고 2번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분별한 도전으로 만들어진 존재'. 요즘의 크리쳐 영화들은 대개 2번 방식을 채택하곤 한다. 대자연에 대한 인간의 원죄와 더불어 환경론적인 이야기까지 함께 메시지로 풀어내겠다는 거지. <언더워터>도 중반까지는 그래 보인다. 석유 시추를 핑계로 이 깊은 곳까지 들어와 땅굴을 뚫는 인간들의 모습. 여기에 펼쳐지는 각종 음모론. 그리고 조연들 중 한 명인 에밀리의 반성적인 대사. 그러나 그 모든 건 다 훼이크였을 뿐... 이 영화는 결국 1번 방식을 고른 영화였던 것이다. 재밌는 건 거기서 한 술 더 떴다는 거지.
상술했듯 중반까지만 보곤 환경론적인 담론을 끌어온 영화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문학적 요소를 가져온 영화였음. 어째 중반부에 유령 마냥 스멀스멀 표류하던 크리쳐 디자인 보고는 '크툴루에서 영향을 받은 건가' 싶었었는데, 결말부에 이르러 그 분이 직접 등판하신다. 시팔, 크툴루 본인이 이렇게 나오는 영화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재난 스릴러에서 생존물로, 그리고 그 생존물에서 크리쳐 호러로 이어지는 장르간 이음새가 꽤 좋다고 느껴졌었는데, 결말부에 이르러 결국 러브크래프트식의 코즈믹 호러로 당도 하고야 마는 영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기 때문에 확실히 놀란 건 있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 주인공이 내리는 마지막 선택도 꽤 신선했고. 물론 <에이리언>도 그랬고 <7광구>도 그랬듯이, 주인공이 자폭 버튼 누르는 결말 자체가 신선한 건 당연히 아니지. 그러나 이건 다른 것도 아닌 코즈믹 호러 아닌가. 강대하고 압도적인 존재에게 짓눌려 허망하고 허무하게 끝나는 게 이 장르의 전통 아닌가. 근데 <언더워터>의 주인공은 그 전통을 깬다. 그냥 벙-찐 상태에서 죽어 초라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본인은 죽되 저 강대한 존재에게 한 방이라도 제대로 먹여보겠다는 심산의 결말. 코즈믹 호러와 양립하기 힘든 그 인본주의적 태도가 나는 썩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 분이 진짜 크툴루라면 죽기는 커녕 어디선가 재생성하고 계실테지만.
근데 솔직히 크툴루 디자인이 잘 된지는 잘 모르겠다. 암만봐도 팔 다리 생긴 갸라도스 느낌이던데. 그리고 영화가 10년만 일찍 나왔어도 더 무서워 보였을 것 같다. 지금 디자인만 놓고 보면 아무래도 <퍼시픽 림>의 카이주들이 떠오르는지라 여차하면 그냥 집시 데인져로 죽도록 팰 수도 있을 것 같음. 근데 코즈믹 호러는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실패한 거잖아.
그래도 소형 크리쳐들의 디자인은 꽤 좋다. 유년기 시절로 보이는 개체는 아무래도 <에이리언>의 체스트버스터 느낌이긴 한데, 좀 자라서 주인공들 옆에 두고 갖고 노는 장면에서의 모습은 인간형 유령처럼 보여 신선했음. 영화 보기 전엔 그냥 문어나 생선 같은 해양생물 베이스의 디자인일 줄 알았거든.
여러군데 미진한 구석들이 있긴 하다. 존나 개쩌는 장르 영화는 아니라고. 그러나 자주 나오는 장르의 영화가 아니기에, 그냥 이 정도면 됐지 싶다. 감독의 전작 <더 시그널>은 여러모로 좆같았는데 감독이 어째 제정신을 차린 것 같다.
덧글
로그온티어 2020/07/15 04:21 # 삭제 답글
그래비티 시점도 가끔 쓰고, [레버넌트] [킹 아서 제왕의 검]에서 본 카메라워킹 등등 영화 자체가 어디서 많이 본 연출의 연속이라서 개성이 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윌리엄유뱅크의 전작 [더 시그널]에서 보여준 것들이 후속작이라 부를 수 있는 [언더워터]에 없었습니다. 아니 그때와 완전 달라요. 흥행이 미진해서 그랬나? 이번 작품에 제작비가 많아서 그랬나? 여러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물론 언급하신 대로, [더 시그널]이 좋은 작품인 건 아니에요. 초중반은 고전 작품 분위기를 재현하려는 건지 엄청나게 느리고 의미도 없었고, 반면에 후반부와 결말은 장난질이 심했잖아요. 당시에 그 영화 보고 저를 포함한 관객들이 헛웃으며 극장을 나갔던 게 아직도 기억납니다. 작가주의라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게, 메세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가 다가오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덥스텝 비슷한 음악이 튀어나오며 줌아웃으로 끝나는데 황당할 따름이었...
그래도 그런 장난질이 [언더워터]에 없길래, 저도 시네쿤님 생각처럼, 정신을 차린 건가 싶었어요. 근데 자세히 보니, 그런 장난질이 사라지니 이 감독의 개성이 없어진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우웨볼이 핸드헬드를 안 했을 때는 영화가 난장판이지만 영화의 규격을 깨는 "아 씨바 할 말을 잊었습니다" 식의 난장판의 특징이라도 있었는데, 우웨볼이 [램페이지]로 핸드헬드를 들면서 감독의 연출특징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영화는 준수하게 빠져 나온... 그 사례와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램페이지]가 잘빠져나온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그냥 재미로 예를 들어봤습니다;;
제 느낌에, [언더워터]는 [이벤트 호라이즌]과 비슷한 영화처럼 느껴졌어요. [이벤트 호라이즌]은 아트워크나 컨셉과 배경은 진짜 좋은데 다른 공포영화 배끼기만 가득해서 특유의 분위기를 잃은 영화였거든요. 이 영화는 [이벤트 호라이즌]처럼 너무 가진 않았지만, 비슷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요. 위에 썼듯이 어디서 많이 본 연출이나 스토리텔링 기법을 너무 많이 남발하는 겁니다. 독백을 듣다보면 가끔 [터미네이터2]가 생각나고요.
저도 결말은 좋았어요. 솔직히... 언제적 크툴루입니까. 우리에겐 니미럴 핵이 있다고요. 니미럴 핵이요. 저는 결말 때문에 [언더워터]가 오히려 러브크래프티안들에게 뻑유를 날리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인본주의 사상은 그냥 그럴싸하게 포장한 거고, 실은 그냥 크툴루에게 한방 먹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동안 러브크래프티안들은 "아냐, 코스믹호러는 인간이 무조건 무력해야해"라는 꼰대질을 설파하곤 했거든요. 호러 계열의 꼰대들은 "인간이 무력하고 어리석어야 한다" "무조건 공포의 대상에게 끝까지 한방 먹어야 한다" 라는 철학으로 영화를 만들잖아요. 근데 거기에 "좆까"라고 이리 내던진 영화는 제 기억에 없었어요. 저는 그점에서 시원하더라고요. 러브크래프티안들 다 좆까라고!
흠흠, 여튼 한편으로 영화 느낌이 에일리언과 비슷하고, 잠수슈츠도 [에일리언:아이솔레이션]의 우주복과 비슷한 느낌이라서 그런지, 영화 자체가 [에일리언] 프랜차이즈를 오마주하면서 동시에 걷어차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하필 제작사도 20세기 폭스고요. 언급하신대로 작은 크리쳐가 체스트 버스터 닮았고, 강인한 여주인공에... 그... 두 남자 주인공이 괴물 발견하고 급히 사투 벌이는 부분은 [프로메테우스]의 그 장면에 대한 반박같았어요. 진짜 비교하자면, 은근히 에일리언 오마주가 많아요! 한 글자씩 나오는 제목도 그렇고, 도중에 선장 죽는 것도 그렇고! 아... 그건 그냥 공포영화 클리셰인가.
그리고 [에일리언] 시리즈가 근본은 코스믹호러에 있었는데, 리들리 스콧이 자기 철학에 심취하느라 코스믹호러를 내던졌죠. 반면에 [에일리언:아이솔레이션]은 1편의 코스믹호러 분위기를 너무나도 뛰어나게 재현했지만 동시에 거기에 매진해버리는 바람에 결말이 시궁창이 되었고요.
그러니까, 그 모든 이미지가 뒤섞이는 겁니다. 여기서, 작가가 에일리언 팬이라고 생각해보는 거죠. 그리고 게임으로나 영화로나 크게 만족하지 않아 심히 빡쳐 있어요. 그래서 이 각본을 쓴거죠. 크툴루가 나오고 배경은 심해지만, 사실 에일리언에 대한 불만들이 뒤섞여 있는 작품인 겁니다. 에일리언에 대한 오마주와 반박, 그리고 근원(코스믹호러와 크툴루)을 다시 불러내는 거죠. 그리고 근원을 죽이는 겁니다.
그런 의식에 흐름에 다다르자, 크툴루가 사망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이 죽인 건 크툴루 뿐 아니라 에일리언도 포함이라고요.
CINEKOON 2020/07/17 16: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