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1 21:38

결백 극장전 (신작)


다소 간에 평범한 영화인 것은 맞다. 그러나 영화 곳곳에서 느껴지는 감독의 노력과 뚝심. 그래, 존나게 뻔해도 이렇게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면 그 자체로 호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열려라, 스포 천국!


샷 디자인을 비롯한 연출이 좋은 영화다. 사건 현장이 되는 장례식장을 롱테이크로 담아내 사실적이고 산만한 느낌과 동시에 난장판이 된 광경을 정말 난장판처럼 묘사하는 오프닝 씬. 플래시백 속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어렸던 주인공의 멱살을 잡을 때 거울을 활용함으로써 두 인물의 표정을 리버스 샷 하나 없이도 한 쇼트 내에서 잡아낸 것. 법정 장면에서 증인석에 앉은 인물의 뒷통수를 그 뒤에 앉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잡아내 두번씩이나 강조하는 카메라의 움직임. 후반부 주인공의 얼굴과 오롯이 겹쳐지는 주인공 어머니의 얼굴. 그리고 강조의 의미로써 사용되는 졸리 효과. 이 정도면 이 뻔해 보이는 장르 영화 안에서 감독이 이전투구 했다는 게 느껴진다.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와 그 활용도도 나쁘지 않은 편. 배종옥이 연기한 캐릭터는 그 전략이 너무 훤히 들여다보이고 뻔해서 종종 거부감이 들지만, 그런 불만들을 어느 정도 잠재워버리는 배우의 연기로 그냥 넘어가게 된다. 허준호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존나 멋있고, 신혜선은 영화 첫 주연작인데 큰 무리가 없었던 것 같음. 이외 재밌었던 것은 박철민과 고창석. 둘 다 대개 사람 좋은 아저씨로 나오거나 개그 캐릭터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여기서는 그런 거 일절 안 함. 그게 예상 밖이라서 좋았던 것도 있다.

허나 연출과 연기, 이 둘 보다 좋게 느껴졌던 것이 바로 각본과 그 각본이 품은 함의였다. 어쩔 수 없는 한국 영화인지라, 중간에 부모 자식 간의 멜로 드라마가 첨부되어 있다. 예상 못했던 부분은 아니다. 애초 누명 쓴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변호하는 딸의 이야기인데 어떻게 멜로적 요소가 없을 수 있겠어. 애초 봉준호의 <마더>도 그러할진대 이런 시놉시스를 갖고 그걸 아예 도려낼 수는 없는 거다. 장르가 액션이든 코미디든 법정 스릴러든 일단 어머니와 그 딸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는 이야기면 모성애 이야기가 100% 나올 수 밖에 없는 거지. 언제나 말했듯 무조건적인 최루성 신파라면 짜증나지만 딱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수준인 것이다.

재밌는 건 그 멜로 드라마를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대한 것. 일단 스포 까면, 누명 쓴 줄 알았던 어머니가 알고보니 진범이었다-라는 반전이다. 더불어 치매 걸린 어머니가 가끔 딸의 얼굴을 알아보기도 한다. 근데 일반적인 한국 법정 스릴러였다면 이 장면들을 에필로그로 넣었을 것 같단 말이지. 반전의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서든, 영화의 감정적인 결말을 위해서든 간에 보통 후일담 형식으로 나오지 않나. 그리고 허준호와 더불어 그와 작당모의 했던 나쁜 놈들이 죄다 감옥으로 줄줄이 비엔나 마냥 끌려가면서 끝나지. 권선징악의 교과서적 모습으로. 허나 이 영화는 그러질 않는다. 오히려 치매 걸린 어머니가 딸 얼굴을 알아보며 자신의 범행을 고하는 장면을 클라이막스 딱 직전에 배치해놨다. 그러다보니 강조되는 게, 바로 직업인으로서 주인공이 느끼는 딜레마.

사건의 진상을 밝히면 자신의 어머니는 감옥에 가고, 과거에 죄를 지었던 자들은 모두 잊혀질 것이다. 반면 어머니를 위해 사건을 조작할 경우, 원죄를 지은 자들은 감옥에 갈 수도 있지만 자신의 직업윤리가 심각하게 손상된다. 바로 이 딜레마가 좋았다. 누구나 죄를 지은 타인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그게 가족이라면? 나의 친구라면? 그렇게 쉽게 판단할 수 있을까? 죄는 지었을지언정, 그 이면에 내 가족이 느끼고 참아왔을 감정들을 더 보듬고 더 보려고 억지로나마 노력하려 하지 않을까? 

그 딜레마 자체도 좋았지만, 영화의 선택도 의외였다. 그래도 교훈 하나 남기기 위해, 나는 주인공이 자신의 양심과 직업윤리에 따라 엄마를 감옥에 보낼 줄 알았지. 그러나 주인공은 타협하고야 만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과 그 사건을 악한들에게 떠넘기는 것. 딱 그 중간 지점에 선다. 그렇게 그녀는 두 개를 다 얻는다. 엄마를 구하고, 악한들을 벌한다. 그러나 그녀의 직업윤리와 내면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그 쿨하고 인간적인 결말이 좋았다. 그리고 그 결말을 가능하게 한 딜레마가 좋았으며, 그 딜레마가 벌어질 수 있게끔 연결된 현재와 과거의 두 사건 구성이 좋았다. 중간에 이상한 부분도 종종 있고, 산만해지는 순간도 분명히 있지만. 어쨌거나 영화가 두 시간 내내 재밌었다. 그리고 그거면 된 것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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