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컨셉은 꽤 좋았다고 생각된다. 이거 완전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캐스트 어웨이>나 <김씨 표류기>로 풀기에 딱 좋았던 설정 아니냐? 맞다, 나는 이 영화에서 좀비가 맥거핀에 불과했어야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스포있다!
<엑시트>랑 여러모로 비슷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20대의 젊은 두 남녀를 주인공으로 삼아 달려가는 재난 영화. SNS나 유튜브 등의 최신 플랫폼을 가감없이 사용하고, 스마트폰과 드론 등의 최신 기기들이 생존 도구로써 기능하는 설정. 좀비 창궐 사태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점도 <엑시트>가 유독 가스 상황을 퉁치고 넘어간 점과 비슷하다. 나는 그거 괜찮다고 봤다. 이제 국내에서만도 제작된 좀비 장르가 한 두 편이 아닐진대, 뻔할 수 밖에 없는 내용으로 오프닝 굳이 낭비할 필요는 없지.
가장 중요한 건 시의성이다. <엑시트>는 끊임없이 뛰고, 또 기어오르는 두 20대 남녀의 모습을 통해 요즈음의 젊은 세대들이 느끼는 현실 속 재난 상황과 그들의 상태를 잘 은유해 보여주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일상 자체가 재난인 상황이잖아. 기성 세대의 성공 신화와 그 시절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단 걸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부모 세대처럼 소위 '회사에 뼈를 묻는다' 정신은 그들에게 있을 수가 없는 거야. 왜? 취업도 어렵거니와 막상 회사 들어가도 그 부품으로만 살고 싶지 않아진 것이거든.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막연한 미래보다, 지금 내 눈 앞의 현재에 집중하는 경향. 금수저와 흙수저를 논하며 절망 끝에서 보이지 않는 희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모습. 그게 요즘의 2,30대 모습이고 <엑시트>는 그걸 썩 잘 보여줬었다.
<#살아있다> 역시 초반 기획 지점은 비슷했을 걸로 예상된다. 근데 이게 뭔 느낌이냐면... 지금의 2,30대 문화에는 1도 관심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중년의 제작 & 기획자들이 그냥 대충 이렇겠거니-하고 만들어낸 2,30대 타겟 영화인 것 같음. 요즘 관심종자들 많은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영화에서 나오는 모든 젊은이들은 죄다 SNS 통해 멍청한 짓들만 업로드하고 있다. 수상쩍은 상황이 터졌는데도 20대 주인공은 다른 유저들과 온라인 게임을 하고, 그 와중에 음성 채팅으로는 '~하삼' 등의 이미 지난 유행어와 말투들이 마구 던져지고 있음. 더 웃긴 건 갑자기 주인공이 빈지노의 힙합에 맞춰 춤을 춘다는 것.
기획했던 사람들도 존나 트랜디하다-라고 자화자찬 하면서 만들었을 것 같다. 선 없는 블루투스 기기들이 곧 젊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뭔지 갑자기 무선 기기들 까는 순간 나오는 것도 예상되다 못해 좀 깼다. 영화 전체가 그런 느낌이야, 옛날에 PC로 했던 파이프 게임. 출발지와 목적지만 딱 정해놓고, 그 사이 구간은 각기 다른 모양의 파이프 부품들을 모아 연결해야만 하는 게임. 이 영화가 딱 그렇다. 분명히 넣고 싶었던 장면이나 설정들이 있었고, 그 사이를 잇기 위해 다른 내용들을 급조한 느낌. 그러니까 개연성이 떨어지지.
가족들이 다 죽은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렇지, 주인공은 갑자기 발악하며 바깥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TV를 마구잡이로 부순다. 그러더니 또 갑자기 아빠 골프채 들고 나가서 좀비들 어그로만 진탕 끌다가 다시 집으로 복귀함. 그것도 가까스로. 이건 그냥 고구마 캐릭터인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싶었던 특정 장면이나 설정을 위해 캐릭터가 희생 당한 거다.
이런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뉴스에 따르면 전체 감염자는 약 5만 명이라는데, 100만 명도 아니고 겨우 5만 명이면서 서울 시내에 미사일이 날아다녀? 빡대가리가 아니고서야 수도 끊길 건 예상 했어야지. 갑자기 물 끊어지니까 당황해? 아니, 그리고 블랙 코미디라도 넣고 싶었던 모양인데 긴급 재난 방송 중간에 라면 광고 넣는 건 뭐냐? 이거 그냥 이후 이어지는 주인공의 라면 취식 먹방으로 잇고 싶었던 것 뿐 아니야? 블랙 코미디는 개뿔. 이외에도 분명히 전기 끊어졌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후 주인공은 스마트폰이랑 드론들 잘만 사용함. 하루 이틀 갇혀 있던 것도 아니고 거의 한 달이 넘는 기간이었는데 대체 충전은 어떻게 해서 쓴 거냐. 보조 배터리라도 한 다스씩 집에 보관해두고 있는 건가.
액션 설계도 끔찍하다. 그저 우리네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졌어야 할 박신혜 캐릭터는 갑자기 밀라 요보비치가 되어 좀비들을 학살한다. 좀비를 연기한 배우들의 표정이나 몸짓 연기는 좋다. 그러나 전체적인 몹씬 관리가 안 되어 있다. 주인공이 쓰러져 있으면 좀비들 걸음걸이가 늦어짐. 그러다가 주인공이 벌떡 일어나면 그제서야 달려들고. 청력 관련된 묘사도 존나 오락가락임. 어느 순간엔 엄청 무디다가, 또 어떤 순간엔 쿠팡맨 마냥 동호수까지 파악해 찾아올 정도로 소머즈 됨. 이거 뭐야, 시발.
하지만 가장 박살난 건 메시지다. <엑시트>는 두 주인공이 처한 암울한 상황을 통해 영화 바깥의 현실을 꼬집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달리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영화 바깥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로했다. 근데 <#살아있다>는? 시발 막판에 갑자기 두 주인공이 자살하려 한다. 특히 박신혜 캐릭터가. 얘는 유아인 캐릭터가 자살하려고 들 땐 바보라고 일갈하며 제지 했으면서, 막판엔 갑자기 태도를 바꿈. 그러다 갑자기 바깥에서 들리는 헬기 소리 듣고 또 입장 바꾸고. 그리고 이 결말은 그렇게 읽힐 수도 있는 것이다. '젊은 너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돼. 존버해도 안 된다고. 너네는 나랏님과 어른들이 구해줄 때만 구제받을 수 있어' 이렇게. 근데 솔직히 이것도 존나 잘 봐준 거다. 처음에는 그냥 '이거 살고 싶으면 인스타그램 열심히 하란 소리인가?'란 생각 밖에 안 들더라. 페이스북이 투자한 영화인 줄 알았다고. 페이스북 오리지널 영화
좀비든 상황이든 죄다 필요에 따라 변덕 부리는 영화. 다시 말하지만, 좀비는 그냥 맥거핀으로 두고 주제적 + 묘사적 측면에서 <캐스트 어웨이>나 <그녀>처럼 갔어야 되었다고 봐. 군중 속의 고독, SNS 묘사 등을 더 강조해서 갔어야 했다고. 지금 버전은 재밌긴 커녕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희망마저 무참히 꺾는 것 같아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덧글
지화타네조 2020/06/30 19:00 # 답글
현빈과 장동건 쓰고 대차게 말아먹은 창궐 생각나네요. 말이 안되는 소재를 다룰수록 세계관 안의 법칙과 그에 따른 사건들은 개연성이 있어야 몰입이 되는데 이건 뭐...
CINEKOON 2020/07/17 16: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