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7 23:22

로보캅, 1987 대여점 (구작)


세기말 기운이 충만했던 폴 버호벤의 1987년 클래식 무비. 그 옛날 동네 꼬꼬마들 모두가 문방구 앞에 모여 로보캅 동작을 따라하게끔 만들었던 영화였지만, 실상은 염연한 청소년관람불가. 다시 봐도 애들이 볼만한 물건은 아니다 싶다.

당시 잘 나갔던 다른 감독들이 연출했더라면 없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들이 꽤 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TV 뉴스 장면. 그 자체로 영화 속 아슬아슬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단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능도 출중했었지만, 따지고 보면 매드 미디어에 대한 폴 버호벤의 지속적 비판이 짙게 깔려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굳이 없어도 이야기 굴러가는 데엔 하등 상관없는 부분이었지만, 감독인 폴 버호벤의 작가주의적 인장이 깊게 새겨진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스타쉽 트루퍼스>에도 이런 거 있었으니.

초반부 경찰서 장면이 재미있다. 폴 버호벤이 정말 연출을 잘하는 게, 쇼트를 잘게 나눠갔어도 상관없었을 부분에 롱테이크를 집어넣음으로써 영화 속 분위기를 잘 전달했다는 것. 뭐, 롱테이크라고 해서 <버드맨>이나 <1917> 급으로 긴 건 당연히 아니다. 그래도 나름 긴 길이의 쇼트들로 경찰서의 정신없고 바쁜 상황을 잘 묘사한게 재미있음.

개봉 당시 마케팅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인공인 줄 알았던 사내가 영화 시작하고 20분 만에 죽어나가니 극장에서 본 관객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근데 암만 생각해도 노 튜닝 상태의 순정 머피는 정말이지 대단했던 것 같다. 지근거리에서 그렇게 많은 총알들을 맞고도 살아남았다는 거 아닌다. 그걸 살아남은 거라 할 수 있나? 어쨌든 정신은 간신히 붙어있었잖아

이어지는 머피 튜닝 과정. 이 시퀀스를 철저히 머피의 시점으로만 묘사한 게 진짜 신의 한 수였다고 본다. 존나 시대를 앞서가는 연출 아니었나 싶음. 다른 영화였다면 로보캅 프로젝트 개발자들의 시점으로 수술대에 누운 머피가 점차 변해가는 과정을 몽타주로 담아냈을 법도 한데, 이 영화는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머피의 고정된 시점 샷으로만 응수한다. 덕분에 내 몸이되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나'이지만 자유의지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을 잘 전달했다고 생각해. 그래서 더 끔찍한 상상들이 머릿속에서 돌아가기도 하고.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이지 ED 209 첫 시연 프레젠테이션은 충공깽이다. 호기롭게 나선 젊은 사원을 죽사발 낸 것도 충격적이지만, 이후 그 결함이 이끌어낼 사업 부진만을 걱정하는 사내 고위층의 사고방식과 그 리액션이 더 쇼킹. 근데 개발자 이 미친놈들은 사내 시연을 하는 자리에서 실탄이랑 미사일까지 실제로 장전해놨다. 진짜 개미친놈들이네, 이거. 이후 시리즈의 전통이 된다는 게 함정

다음은 로보캅으로 재탄생한 머피의 활약 묘사. 말이 공권력에 정당한 법 집행이지, 범죄자 인권 따위 안중에도 없는 쿨하고 거친 묘사가 일품. 경찰 신분인데다 이름마저 로보'캅'이니 공무원인 것은 맞지만, 행하는 폭력의 강도로만 보면 자경단이 따로 없어 보일 지경이다. 게다가 여기에 초반부에서 주인공을 죽여버린 악당들을 잡는 내용이 추가되니 타란티노스럽게 '복수' 테마까지 들어가 더 좋음. 진짜 정의와 복수는 한 끗 차이여. 하여튼 첫 부임한 날 조져버린 상가털이범이랑 성폭행 미수범, 인질범은 끝내 불쌍해보일 지경. 존나 나쁜 새끼들인 건 맞는데 하필 로보캅 첫 기동식 날 그 지랄들 떨어서... 범죄에도 운이 필요하다.

범죄자 집단과 결탁한 거대 기업, 경찰력 등의 공권력을 민영화 하려는 움직임 등. 자본주의의 그림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 영화이기도.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인 로보캅 역시 자본주의 거대 기업의 투자와 서포트가 없었다면 그 존재가 애시당초부터 불가능했을 터이니 여러모로 아이러니.

기계에서 인간으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이고, 또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유의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는 영화다. 다만 생각보다 그 묘사나 강도가 진하지는 않은 편. 차라리 이건 2014년에 만들어진 리메이크작이 더 깊게 다뤘던 것 같다. 폴 버호벤은 그냥 어른 취향의 존나 폭력적인 영화를 만드는 게 더 우선순위였던 것 같기도 하고.

뱀발 - 계단에게 패배하고 땡깡부리는 ED 209의 모습은 언제 봐도 졸귀. 언제 봐도 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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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포스21 2020/07/07 23:38 # 답글

    크큭 계단 씬은 아마 3편이던가? 에서도 다시 나오죠 .
  • CINEKOON 2020/07/17 16:37 #

    3편에서 다시 나옵니다! 정말 잠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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