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7 16:27

반도 극장전 (신작)


소신 발언이라면 소신 발언인데, 난 <부산행>을 그리 재밌게 본 편이 아니다. <부산행>은 이미 어느정도 규격화 되어버린 장르에 참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전개를 더했다는 미덕이 있었지만, 일단 내가 좀비 장르에 별로 애정이 없는 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후반부의 아방가르드한 신파 씬이 날 무척이나 괴롭혔었다. 내가 진짜 '그냥 울어라, 울어!'라고 외치며 눈물 콧물 짜내게 하는 장면이었으면 싫어했을 망정 이런 이야기까지는 안 했을 거야. 존나 싫어하기는 하지만 <신과 함께 - 죄와 벌>이나 <7번방의 선물> 같은 영화들의 신파에 비해서도 좀 못 만든 인상이었다고. 갑자기 거기서 공유의 분유 광고 st가 왜 나오냐 이 말이여.

속편 이야기에서 전편 잡담이 길었네. 하여튼 난 <부산행>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근데 이상하게도 <반도>는 살짝 내 스타일이더라. 내가 좀비 장르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지? 그러니까 이 말은 고로, <반도>가 좀비 장르 영화처럼 안 보인다는 소리다. 이에 따라 당신이 전편을 좋아했거나 좀비 장르의 애호가라면, <반도>가 곱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터다.


열려라, 스포천국!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나 <새벽의 저주>가 아닌 <매드맥스>를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영화는 그저 좀비 장르의 외피만을 두르고 있을 뿐, 실상은 그냥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 자동차 액션 영화의 길을 간다. 모종의 사태로 황폐화되고 위험해진 배경 아래, 정신나간 파시스트 '임모탄'은 '서 대위'와 '황 중사'로 나뉘어 어레인지 되고, 그를 따르던 미쳐버린 '워보이'들은 미쳐버린 황 중사의 졸개들로 리바이벌 된다. 초식 동물처럼 거대한 화물차를 작고 날렵한 육식 동물들 마냥 떼를 지어 사냥하는 자동차들의 이미지가 다시 재생되고, 거칠게 운전하며 액션을 벌이는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 역시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속 그것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물론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와 비교했다고 해서, <반도>가 그 정도의 액션 퀄리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근데 그건 <매드맥스>가 너무 높은 기준치의 영화라서 그런 것도 있다고 본다. <반도>의 카체이스는 할리우드의 그것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엔 역시 무리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질주의 박력을 잘 전달하는 편이다. 때때로 과하고, 때때로 허무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카체이스 자체의 쾌감은 어느 정도 존재하는 편.

다만 역시나 좀비 장르로써의 정체성은 엄청나게 옅다. 이제 좀비들은 그저 다른 영화 속 들짐승 정도의 취급에 지나지 않는다. 좀비 영화인데 좀비가 안 무섭다. 그래서 <#살아있다>가 안타깝지 않았었나. 물론 <반도> 역시 '좀비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라는 묘사로 응수하고 있다. 근데 <#살아있다> 때도 말했던 것이지만 이 묘사 자체가 <워킹데드>와 [라스트 오브 어스] 등의 좀비 장르에서 이미 우릴 때로 우린 거잖아. 역시나 새로움은 없다. 그리고 인간이 좀비보다 무서워 봤자지. 가장 무서운 인물로 그려졌어야 할 김민재의 황 중사는 배우의 이전 작들 이미지대로 그냥 개그 캐릭터가 되어버린다. 이 새끼는 존나 악랄하고 존나 무서웠어야 했던 새끼인데 어째 전편의 김의성 보다 만만이 콩떡이다. 서 대위와 그 부하 사이에서 양주 한 병을 들고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장면 있었잖아. 얘는 거기서 뭔가를 했어도 대차게 했어야 했던 놈이다. 역시 비교하기에 민망하지만, 그래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 새끼 발가락 정도는 되었어야 했던 놈이다. 근데 그걸 못한다. 안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덕분에 만만해 보임. 별로 무섭지도 않고, 심지어 최후도 존나 허무.

이건 메인 악역의 지위를 황 중사가 서 대위와 나눠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둘 다 같은 방식으로 강조하자니 개성이 옅어지고, 둘 다 힘을 빼버리자니 영화 전체의 전개가 말랑해지고. 제일 무서울 것 같던 황 중사가 허무하게 리타이어하고, 그 와중 권모술수에 능할 것 같던 서 대위 역시 불쌍하게 퇴장. 얘는 첫 등장에서 자기 목구멍에 총구 밀어넣는 것으로 강조해주더니 결국 이렇게 가네. 이럴 거면 그런 묘사를 왜한 걸까. 물론 이 지옥같은 상황 속에서 죽음을 통해서라도 탈출하고자 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겠지만... 

세계관 묘사의 디테일이 헐겁고 좀 떨어지기는 한데, 그럼에도 로컬라이징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을 보고 있자니 여러모로 재밌더라. <새벽의 저주>에서 주인공 파티가 대형마트를 기지로 삼았던 것처럼 이번 영화에서 역시 홈플러스가 병참기지화. 커피 빈 앞에서 건파이트하고 시내버스 이용해 취사장 만든 모습도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중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스럽던 것은 바로 특유의 그 군대 문화. 서 대위랑 황 중사 둘 다 최악의 간부 및 선임들이던데. 시팔 남초 상황에서의 그 찐득함이 왠지 모르게 느껴져 PTSD가 올 뻔 했다.

더 풀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부분들이 역시나 많다. 앞서 말했듯 남초 상황이니 이정현이 연기한 '민정'이나 그녀의 두 딸은 어떤 취급을 받았을까-에 대한 디테일도 살릴 수 있었을 거다. 그러면 영화가 청불될 것 같은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반도의 상황이 더 지옥처럼 느껴졌을 텐데. 아니면 넷플릭스의 <킹덤>에서 느꼈던 것처럼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한 한반도의 지리적 사회적 특성을 더 파고들 수도 있었을 거다. 제아무리 좀비 창궐 한반도라지만 그냥 두기엔 너무 아까운 땅이잖아. 중국이나 일본 애들이 어떤 스탠스를 취했을지 살짝만 보여줬어도 더 재밌었을 것 같은데. 아, 말 나온 김에. 한반도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 불법 이민자 취급 받으며 차별 받는 등의 묘사는 그 자체로 현실적이라 재미있었다. 사실 한국 관객 입장에서는 좀비 바이러스보다 중국이랑 일본이 우릴 그렇게 취급한다는 것 자체가 더 빡치는 아포칼립스 상황일 듯.

이제 신파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영화도 신파가 진짜 존나게 심각하다. 결말부의 신파는 노골적이다 못해 억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다행인 건, <부산행>의 분유 광고 st 같은 연출은 없었다는 거... 이걸 다행으로 봐야하나 싶지만, 하여튼 <부산행>에서 크게 한 번 데인 기억이 있기에 신파도 이 시리즈의 전통이다-라고 생각하며 보면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된다. 

권해효가 연기한 인물은 100% 죽을 것 같았다. 근데 진짜 죽이고 신파할 거였으면 그 인물을 영화 내내 매력적으로 그려놨었어야지. 관객 입장에서 '꼭 살았으면 좋겠다'고 느끼게 만들어놨었어야지. 물리적 비중 자체가 별로 없는 인물이었는데 막판에 그렇게 죽이면 눈물 나겠냐고.

메시지는 좋다. 장르 특성상 자신을 희생하려드는 캐릭터가 있기 마련인데 끝까지 구해내 모두 함께 살아남는 결말. 메시지도 좋고 가족 단위 관객을 노리는 여름 블록버스터로써는 이상적인 결말이다. 근데 그걸 쌓아가는 방식이 진짜 구리다 못해 더럽다. 그 메시지를 주려면 일단 아이들의 엄마인 민정을 모성애의 화신이자 순교자로 그려야 하는데, 따지고 보면 그 상황 속에서 굳이 그녀가 희생할 필요는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냥 주인공이 업고 뛰면 되는 거 아님? UN군 있는 곳까지만 업고 가면 빨리 헬기 탈 수 있을 것 같던데? 심지어 자살을 선택하려다 이내 각성하고 탈출하는 민정은 갑자기 밀라 요보비치가 되어 좀비들을 싹 쓸어버리기에 이른다. 이럴 거면 왜 자살하려고 하셨어요...? 아, 신파해야 되니까...

생각보다 재밌게 보고 있는 나 자신에게 놀라다가, 결말부로 갈수록 실망하는 나에게 안심하는 영화. 아니, 연상호가 말했더만. 신파는 대중성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저기요, 저도 대중이라고요... 제 주변도 다 대중이라고요... 다들 싫다는데 왜 혼자 난리야... 할 거면 적당히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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