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1 17:17

아르고 황금 대탐험, 1963 대여점 (구작)


그리스 신화가 존나 치트키인 게, 그 자체로 존나 잘 만든 이야기들의 합집합인데다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들이 삼선짬뽕 마냥 섞여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요리해도 웬만해선 재밌을 수 밖에 없다는 점. 게다가 이야기적 융통성이나 호환성도 좋아서, 그 원형만 따다가 다른 시대의 다른 국가에서 리메이크해도 크게 이물감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오늘 다룰 영화는 코드화 시킨 그리스 신화를 이식해 새로 만든 현대물은 아니고, 그냥 고전 그리스 신화를 있는 그대로 영화화시킨 케이스다. 미국식 피자 골목에 이탈리아 피자 장인이 떴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대쪽같은 전개가 존나 마음에 든다. ‘어차피 이거 존나 유명한 이야기인데 구구절절 설명 다 안 해도 알지?’라는 쿨한 태도. 그렇다. 당신이 그리스 신화를 알든 모르든, 알면 또 얼마나 알든 그딴 건 다 상관없는 것이다. 그냥 시작부터 전투 직전 상황. 근데 그 와중 신들의 농간 아닌 농간에 빠져 이상한 신탁 듣고 칼 들었다 놨다 하는 펠리아스 꼴이 웃김. 당신이 황제든 거지든 인간이라면 그냥 죄다 올림포스 신들의 장기말에 불과한 것이다. 

시작도 대쪽같은데 이후 전개는 그냥 다 강행돌파. 펠리아스는 불과 몇 씬만에 자신과 신탁으로 관련된 이아손을 만나게 되고, 이아손 역시 불과 몇 씬만에 탐험대를 꾸려 황금양털을 겟하기 위한 세상의 끝 원정에 나선다. 근데 진짜 신화는 신화인 게, 이게 현실의 이야기였더라면 과연 이 모든 게 다 가능했을까 싶음. 신들의 도움 하나 받지 않고 탐험대를 꾸리고 선박도 건조한다? 시팔, 이아손 너 진행비는 어디다 꿍쳐뒀던 거냐.

고전적인 그리스 신화를 답습하는 이야기답게, 이후의 탐험들은 모두 RPG 게임 속 퀘스트들처럼 진행된다. 물론 따라하기로는 그 쪽이 이 쪽을 따라한 거겠지만. 하여튼 헤라라는 역대 최강 NPC의 도움으로 여러 퀘스트들을 단계단계 깨부수는 이아손과 그 원정대. 사실 고전 신화 원작이다보니 이야기는 뻔하고, 영화 자체도 1960년대 제작이었던지라 액션성도 여러모로 부족한 게 사실.

근데 레이 해리하우젠의 빛나는 스톱모션이 그 모든 단점들을 다 상쇄시켜버린다. 

앞서 말했듯 196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잖아? 근데 여기 나오는 거대 청동상 탈로스의 움직임과 디자인을 보라고. 그 덩치에서 오는 위압감과 공포는 고지라의 그것에 못지 않다. 그래, 여기까지는 그래도 1933년작 <킹콩>과 다를 게 뭐냐-는 다소 시큰둥한 뉘앙스로 일관할 수도 있겠다. 근데 그 이후 이어지는 하피 콤비와 히드라 묘사, 그리고 끝판왕 히드라 사골 군단 묘사까지 보면 당신이 지금 2020년대에 살고 있든 2030년대에 살고 있든 입이 쩍 벌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스톱모션 기법으로 만들어진 괴물들이 실사 촬영분 속 인간 배우들과 뒤섞이는 과정이 흥미롭고, 무엇보다 그 움직임이 유려하다. 보는내내 <타이탄> 같은 현대 영화들을 떠올리고 겹쳐가며 보았는데, 그 자체의 스펙터클은 <타이탄>의 압승일지 모르나 디테일이나 스톱모션 특유의 움직임에서 오는 그 기묘함에 있어서는 이 영화 판정승.

존나 웃긴 건 이렇게 대단한 고전이면서도, 결말이 클리프행어라는 것. 찾아보니 이 다음 속편이랄 것도 없더만. 그냥 전체 신화의 일부에 귀속된 영화 정도로 끝내고 싶었던 걸까. 하여튼 쩔어주기는 겁나 쩔어준다. 과거 ‘신화’가 갖고 있던 속성들이, 지금의 ‘영화’에게 그대로 이식되는 경험. 이 정도 영화면 그 자체로 신화 추대해줘도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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