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31 14:28

테넷 극장전 (신작)


21세기, 새로운 시대의 스탠리 큐브릭이라 할 수 있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바로 그 점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어떻게 보면 동 시기의 스티븐 스필버그 보다도 더 강한 권력을 갖고 그에 못지 않게 대우 받고 있는 감독이다. 작품성은 물론이고 매 작품마다 흥행에도 성공해왔다. 그 때문에 워너브라더스에서는 그를 자사와 관계 맺고 있는 여러 감독들 중에서도 거의 최상급의 대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일단, 그 때문에 좋은 점도 있다. <인셉션>이나 <덩케르크> 같은 기념비적 실험 영화들이 블록버스터급 규모의 거대 예산을 책정받아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점. 이는 분명한 장점이다. 놀란을 현 시대 할리우드의 마지막 '작가'로 추켜세워주는 것 역시 이러한 일련의 도전들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거대 스튜디오보다 더 커진 놀란이라는 감독은, 결국 <테넷>에 이르러 작가로서 아주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관객들이 따라오고 있건 말건, 그냥 나는 내 길을 가겠다는 태도. 이게 과연 상업 대중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감히 취할 수 있는 스탠스일까? 


열려라, 스포천국!


물론 안다. 놀란의 팬들은 그의 영화를 N차 관람하는 것에 기꺼이 시간과 돈을 쓴다.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네 번 볼수록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의미들이 발견된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실제로 그런 부분들도 없진 않으니까. 그러나 항상 말해왔듯이, 재해석의 재미를 위한 다회차 관람을 장려하려면 기본적으로 영화가 장르 영화로써 재미있어야 한다. 이건 절대적인 진리다. 이해가 어렵고 내용 전개가 벅찬 영화라 할지라도, 기본적인 '재미'만 있다면 홍보사에서 N회차 장려 캠페인 따위를 부러 벌이지 않아도 관객들은 기꺼이 재감상을 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재감상을 하면서, 놀란이 원하고 또 의도했던 여러가지 요소들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내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테넷>이 그런 영화였는지 의문이다. 물론 <테넷> 좋은 영화고 놀란 밖에 할 수 없는 여러 창의적 시도들로 가득 차 있는 영화인 것은 맞지만, 장르 영화로써 기본적인 재미를 갖추었는가-하고 자문한다면 내 대답은 '글쎄, 아니올시다' 정도일 것이다. 

이해하려들지 말고 그냥 느껴라-라고 직접 말하고 있는 영화답게, 여러 과학적 요소들만 대충 퉁치고 넘어간다면 관객으로서 이해하기에 그리 어려운 영화인 것은 아니다. SF 영화로써가 아니라 에스피오나지 영화로써의 큰 줄거리만 붙잡고 간다면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그 과학적 요소들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놀란은 "<테넷>은 기존의 흔한 시간 여행 영화들과는 다르다"라고 누누이 말해왔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테넷>이 그 기존의 흔한 시간 여행 영화들과 많이 다른 영화인 것도 아니다. 중반부까지 방독면과 타이밍으로 숨겨낸 단역들(처럼 보이는 인물들)의 정체 역시 기존의 다른 시간 여행 영화들에 단련된 사람이라면 쉽게 눈치챌 수 있을 만한 것이고, '할아버지 역설' 등으로 어렵게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그 또한 타임 패러독스로써 이미 <터미네이터>와 <백 투 더 퓨쳐> 같은 영화들이 더 손쉽게 해낸 것들이다. 그러니까 정말 냉정하게 따지면, 이 영화는 시간 순행과 시간 역행의 묘사를 한 프레임 내에서 펼쳐내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렇게 색다른 아이디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더 차갑게 말하면, 그 시간 역행을 표현해내는 리와인드 묘사 역시도 그렇게 강한 시각적 쾌감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엔 누구나 리와인드 영상을 찍고 만들 수 있으니까.

장르적으로 가장 아쉬운 건 역시 액션 묘사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액션 연출에 젬병이다'라는 평가를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이후 내내 받아왔다. 이번 영화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 물론 대인 격투 액션에 있어서는 장족의 발전까진 아니여도 꽤 성장했다 말하고 싶다. 주인공과 방독면 쓴 주인공의 시간을 넘어선 역행 격투는 그 자체로 꽤 흥미진진한 볼거리고, 무엇보다 그 합과 타격감이 기존의 놀란 영화들에 비해 확연히 나아졌다. 그 부분은 인정할 만하다. 그럼에도 정작 가장 큰 힘을 쏟았어야 했을 클라이막스 대규모 전투씬이 너무나도 허약하다. 그 장면만 떼놓고 보면 <헝거 게임> 시리즈나 <메이즈 러너> 시리즈 같은 중저예산의 영어덜트 영화 속 클라이막스처럼 보일 정도로 허접해 보인다. 놀란은 언제나 마이클 만 감독의 <히트>에 대한 애정을 밝혀왔고, 실제로 자신의 걸작인 <다크 나이트>에서 노골적으로 <히트>를 오마주함으로써 그 영화에 대한 존경을 공공연히 했다. 그러나 <테넷>의 클라이막스를 보라. 그걸 <히트>와 비교해보라. <히트>를 좋아한다 말하는 사람치고 총격 액션이 정말이지 형편없단 생각을 했다. <히트>는 마이클 만 감독의 집착에 가까운 총기 묘사와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 만들어진 화기 액션 씬으로 유명한 영화다. 이에 비하면 <테넷>의 클라이막스 전투씬 속 화기 묘사는 정말이지 가관이다. 소총의 격발에서 오는 흥분도, 타격감으로 응당 지불 되었어야 할 쾌감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놀란의 영화들 속에서 소총은 물총인 것처럼 느껴진다.

<인셉션> 역시 어려운 영화였지만, 그럼에도 관객들과 발걸음을 나란히 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영화였다. 대사를 통해 전달되는 설명이 좀 노골적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세계관과 그 규칙들을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영화였다고. 그러나 <테넷>은 그딴 게 일절 없다. 관객들이 이해하거나 말거나,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들을 그들이 알아듣고 있거나 말거나 그냥 우직하게 돌진하기만 한다. 좋게 말하면 패기고, 나쁘게 말하면 객기가 될 것이다. 2억 달러가 넘는 순 제작비를 가진 영화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우직하게 밀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감독인 놀란의 작가주의 정신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다수의 최대 쾌락을 목적으로하는 블록버스터 대중 영화로써는 실패한 모양새다. 오해의 여지가 있을까봐 다시 말하면, 영화가 어려운 건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이다. 어렵더라도 그를 관객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줄 자세와 태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장르 영화로써의 기본적인 쾌감을 전달하면서 관객들을 후킹하고 있는지. 바로 그 점에서, <테넷>은 실패했다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놀란의 대담한 상상력과 그를 구현하는 추진력은 대단해 보인다. 이젠 놀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강렬한 오프닝 묘사도 여전히 힘있고, 팽팽하게 당겨진 지적 쾌감도 충분하다. 미식 축구 경력으로 단련된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연기는 단단해 보이고, 이에 기름칠을 해주는 로버트 패틴슨의 능글맞은 연기도 마음에 들며, 케네스 브레너의 뭉툭 하면서도 뾰족한 악당 연기는 실로 매력적이다. 

그러나 언제나 이과 감성의 감독이었던 놀란답게, 여전히 이야기의 감정적인 측면에서는 부족한 모양새. 놀란의 영화들에는 항상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가 주인공이었고, 그 남자 주인공의 상흔으로서만 여성 인물들이 존재했다. <다크 나이트> 3부작에서는 신경 쇠약 직전의 '브루스 웨인'이 등장했고 그의 연인은 죽음을 맞는다. <인셉션>에서는 삶이 피폐해진 '코브'가 무의식의 세계에서 그를 죽이려 하는 죽은 아내의 혼령과 싸워왔다. <인터스텔라>에서 우주 끝자락에 놓여진 주인공 '쿠퍼' 역시 언제나 그의 죄의식엔 딸 '머피'가 존재하지 않았던가. 놀란의 영화들은 항상 그래왔고, <테넷> 역시 마찬가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존의 영화들에 비해 그 묘사가 더 빈약하게만 느껴진다. 소꿉친구에서 비롯된 연인 관계, 남편과 죽은 아내, 아버지와 딸 등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기존 영화들 속 관계들과는 달리, <테넷>의 그것은 그저 한 남자와 한 유부녀로만 짝지어진다. 그렇다고 남자 주인공이 왜 그 유부녀에게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도 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 점이, <테넷> 역시 인물들의 감정선에는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 된다. 한 손으로는 밥을 먹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루빅스 큐브 세 개를 저글링하며 풀어대는 듯한 실력으로 플롯을 짜왔던 크리스토퍼 놀란. 내 장담컨대, 그는 평생동안 제대로된 멜로 드라마를 찍지 못할 것이다. 애초 본인부터가 관심없겠지만.

욕 먹을 만한 멘트지만, 어째 크리스토퍼 놀란은 점점 마이클 베이처럼 되어가는 것 같다. 물론 영화 만드는 실력이 마이클 베이처럼 형편없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테넷>이 아무리 내 취향 아니었어도 마이클 베이의 로봇 병정 놀이 시리즈에 비해서는 훨씬 낫지. 내 말은, 영화외적인 부분이 비슷하다는 말이다. 마이클 베이 역시 한 때는 <더 록> 같은 불세출의 액션 영화를 찍은 적 있는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흥행하면 흥행 할수록 그의 권력은 커져만 갔고, 끝내는 여느 제작자와 여느 스튜디오도 간섭하지 못하는 현장의 절대권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아무도 제작적인 태클을 걸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으로 이어졌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셉션>까지는 분명히 흥미로웠다. 그러나 그 이후, <다크 나이트 라이즈>부터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테넷>까지. 스튜디오 보다 더 커진 감독의 소신과 패기가, 끝내는 극단적인 방향을 취하고만 있는 것 같아 점점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 정도면 소신과 패기가 아니라, 고집과 객기인 것 아닐까? 물론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여전히 놀란의 영화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는 그저 나 개인의, 소수의 의견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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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이젤론 2020/08/31 23:31 # 답글

    좀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터미네이터의 놀란버전이라고 봐도 되기는 하죠. ㅎㅎ
  • CINEKOON 2020/09/04 13:31 #

    근데 그 놀란 버전이라는 게 너무 극단적인 작가주의적 버전인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듭니다
  • 잠본이 2020/09/01 00:49 # 답글

    부분 리와인드 묘사야 닥터 스트레인지가 신나게 보여줘서 기대는 별로 안되는데 어떨려나 싶군요.
    닭나라에 실망하고 인터스텔라 보고 졸았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요즘 놀란신은 영화찍을때 그냥 관객은 들러리로 생각하게 된거 아닌가 싶은...
  • CINEKOON 2020/09/04 13:32 #

    하긴 생각해보면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끗발나게 써먹었던 묘사이긴 하군요. 그 영화 속 그 묘사가 훨씬 더 재밌었고...
    그나저나 아무리 대단한 감독이여도 관객을 들러리로 생각하게 된 거면 그건 그냥 대중영화 감독으로서 수명 다한 거 아닌가요?!
  • 유디 2021/01/04 00:57 # 삭제 답글

    정말 저랑 똑같이 생각하셨어요. 제가 느낀점을 그대로 다 느끼셔서 놀랐습니다.
    개인적으로 워너브라더스가 불쌍한 영화였어요. 그 막대한 손실을 어떻게 메꿀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가장 큰 문제는 캐릭터!! 주인공이 너무 매력없어서 별로였어요... 주인공의 캐릭터 부각이 안되서 별로였어요. 특히 여주인공 캣은 최악!!!!! 왜 유부며에게 특수요원이 집착하는지도 모르겠고... 진짜 마지막 액션씬은 최악의 최악이에요!! 대규모 전투씬인데 적군이 안보이는게 너무 이상하고 그 인버전 표현한다고 뒤로 걸어가는게 너무 이상했어요 진짜 넷플릭스로 공짜로 보면 좋을 영화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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