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3 20:03

히어로는 없다 극장전 (신작)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수사하기 위해 급파된 것은 신출내기 젊은 형사와 은퇴를 코앞에 둔 노년의 베테랑. 여기까지만해도 벌써 데이비드 핀쳐의 <세븐>을 필두로 숱한 유명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들의 제목들이 줄기차게 떠오르는데 영화는 여기에 헐크나 아이언맨, 배트맨 등의 코믹북 속 수퍼히어로들까지 끌고 들어와 신명나게 흔들고 또 뒤섞는다. 때문에 얼핏얼핏 유치한 부분도 있고, 미스테리가 중심인 영화임에도 좀 간파되는 지점이 있으며, 어찌보면 또 뻔한 영화인 것도 맞지만. 그럼에도 취향만 맞는다면 정말이지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다. 특히, 당신이 수퍼히어로 만화와 영화의 팬이거나 스릴러 장르 영화를 애호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정말 신나게도, 난 그 둘 다였다. 그래서 존나 재밌게 봄.


스포는 미약하게.


어줍잖게 패러디나 하다가 끝내겠다-라는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일단 의문의 살인사건 이후 결성된 형사 콤비를 보고 있노라면 상술했듯 <세븐>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지 않은가. 때문에 영화는 초장부터 패러디 + 오마주 컨셉을 부러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뿐이었다면 <무서운 영화> 시리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히어로는 없다>는 딱 한 편의 제대로된 영화로써 건실하게 존재하고 있다. 영화에 언급되고 있는 여러 대중문화 요소들을 알고 있으면 더 재밌게 볼 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한 편의 영화로써 오롯하게 존재할 수는 있다는 점. 그 부분이 대단하다. 물론 언급되는 대중문화들을 알고 보면 당연히 더 재밌는 건 맞지.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들과 수퍼히어로 코믹북 뿐만 아니라 말그대로 여러 대중문화들에 대한 언급이 툭툭 튀어나온다. 젊은 반장님과 주인공 형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제국의 역습> 속 한 솔로 모멘트라든지, 배트맨의 숙적을 연기했던 잭 니콜슨과 히스 레져 관련 대사라든지, 아니면 <왕좌의 게임>이나 <반지의 제왕> 피터잭슨 드립이라든지. 여러 대중문화와 서브컬쳐들에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이지 더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 콕 집었던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와 수퍼히어로 코믹북들에 대해서만 코멘트하고 넘어가는 영화였다면 딱 거기까지였을 뿐이었겠지만, 영화는 더 넓은 범위에서 우리가 알고 또 사랑했던 '대중문화'들에 대해 다룬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각기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종의 선입견 아닌 선입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허무맹랑한 만화책 속 영웅들의 탄생 신화를 아는 것, 오타쿠들과 함께 영화와 게임 속 주인공들의 의상을 따라 입으며 코스프레를 하는 것. 한 마디로 내가 또는 누군가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서로 인정하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게 곧 연쇄살인사건의 실마리가 된다는 것. <히어로는 없다>는 언젠가 대중문화가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것에 대해 강렬한 믿음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다만 수퍼히어로의 탄생기로써 영화가 좀 애매한 지점은 있다. 어떻게 보면 해피엔딩이기도 하고 베드엔딩이기도 한 결말이거든. 주인공은 결국 모두의 바람과, 스스로의 결정으로 수퍼히어로가 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메인 빌런이 꿈꾸었던 목표 또한 바로 그것 아니었던가. 주인공이 수퍼히어로로서 거듭나 자신을 징벌하고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 때문에 이 영화의 결말은 주인공의 승리이기도 한 동시에 악당의 승리이기도 하다. 바로 그 점에서 기존의 비슷한 장르 영화들과는 좀 다른 느낌의 결말이었다. 심지어 그 멜랑콜리한 결말에 대해 일말의 도덕적인 코멘트도 없음. 쿨하다면 쿨하고,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이다.

미스테리의 중추가 되는 수퍼 빌런의 정체. 그러나 그는 좀 뻔한 감이 있다. 영화 중반 이전부터 슬슬 의심가기 시작하더니 뭐야, 결국 그 사람 맞잖아. 근데 사실 흑사병 돌던 당시의 중세 유럽 의사들 가면이 나오는 순간 영화는 힌트 다 줬던 거다. 하여튼 바로 그 때문에 영화가 좀 맥빠지는 감은 있다. 근데 워낙 다른 부분들이 재밌어서 별로 신경 안 쓰임.

하여튼, 여러 대중문화에 대한 언급들을 적재적소 알맞은 타이밍에 재밌게 끼워넣어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인 것은 맞다. 그래, 대체 언제까지 우리는 셰익스피어와 모차르트의 영향권 안에만 있을 것인가. 시간이 아주 조금만 더 지나면, 현재의 우리가 신이나서 향유 중인 바로 그 대중문화들이 예술의 경지에 오르고 결국 고전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게 뭐가 대수냐'라고 하던 서브컬쳐들이 곧 학생들의 교과서에 실리는 날이 올 것이다. <터미네이터> 세계관 속에서 인간들을 멸종 시키기로 작정한 슈퍼 컴퓨터 AI의 이름은 무엇인지, 헐크는 왜 회색 헐크와 녹색 헐크로 나뉘는지, 크레토스는 왜 신들을 죽이려하는지, <제국의 역습> 속 최고의 대사는 무엇이고 또 해리 포터가 그토록 찾아 헤메이는 세 가지 죽음의 성물은 무엇인지. 그렇다. 언젠가는 지금의 대중문화가 상식이 되는 순간. 우리가 즐겁게 향유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들이 위대해지는 순간. <히어로는 없다>가 말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대중문화가 우리를 구원하는 순간이 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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