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9 17:06

나를 차버린 스파이, 2018 대여점 (구작)


개인적으로 이런 설정 꽤 좋아하는 편이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별다른 스킬도 없는 일반인 혹은 민간인이, 자의와 상관없이 갑자기 프로페셔널의 세계로 던져져 생존하기 위해 무엇이든 한다는 이야기. 이 경우에는 두 명의 일반인이 세계의 평화가 걸린 첩보 세계에 내던져진 케이스. 보통 이런 이야기의 포인트는 주인공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첩보 영화에서 으레 벌어지는 추격전에서도 주인공들은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아니라 자전거 따위를 탄채 도망쳐야 더 재미있고, 총격전 상황에서도 너무 총을 쉽고 멋지게 쓰는 것보다는 어설프더라도 기지를 발휘해서 총 아닌 다른 기상천외한 무기로 살아남는 것이 더 설정의 재미에 부합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정작 그러한 설정을 메인으로 꿰어놓고도 잘 쓸 생각이 별로 없어보인다.

일단 영화는 어쩔 수 없게도 캐릭터 무비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개성 강한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 둘의 관계를 핵심으로 에스피오나지 세계를 탐방 했어야지. 그러자면 일단 주인공이 될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잘 소개 했어야 한다. 그 둘의 매력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게 도와줬어야 한다. 그러나 영화는 두 주인공을 소개하고 나서 불과 두세씬 만에 이들을 사건의 정 가운데로 던져 버린다. 관객 입장에서는 아직 친밀감을 채 느끼지도 못했는데 열차가 먼저 출발 해버린 느낌. 그렇다고 그 짧은 시간동안 농축 엑기스 마냥 그 둘을 재밌게 잘 소개한 것도 아니다. 밀라 쿠니스가 연기한 '오드리'는 평범하다 못해 지겨운 인상의 인물이고, 케이트 멕키넌의 개인기만 믿고 어설프게 조형한 '모건'은 현실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웃기지도 못하는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코미디와 액션이 결합된 영화다. 그럼 둘 다 잘했어야 하고, 못해도 둘 중 하나만은 살렸어야만 했다. 그러나 둘 다 실패한 모양새. 코미디랍시고 시종일관 개그를 던져대는데 별다르게 웃긴 포인트는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너무 설계도가 보였다. 악당을 반쯤 죽여놓고 정보를 캐기 위해 그의 스마트폰을 탈취한 상황. 근데 스마트폰이 자꾸 지문 인식을 요구하네? 그래서 만지기 꺼림칙하지만 악당 시체의 손을 잡고 스마트폰을 열 수 밖에 없네? 그럼 스마트폰 연 다음에 설정 들어가서 지문 인식 설정을 바꿔놨어야지. 영화는 아무 것도 모르던 주인공이 그 악당 시체의 엄지 손가락을 잘라 립스틱 안에 보관하는 것으로 개그를 만든다. 옆에서 "엄지 척!" 드립을 쳐대는 주인공의 친구 역할은 나쁜 의미로 화룡점정. 이외에도 게스트하우스 장면에서 주인공들을 겨누고 있는 악당이 어떻게 될지 역시 눈에 다 보이더라. 무엇보다 코미디는 타이밍과 예상불가능성으로 조립되어 있는 장르다. 근데 그 두 개를 다 실패했으니 결과물로 웃음이 나올리 만무한 거지.

그럼 액션은? 액션도 형편없다. 무엇보다 분량이 별로 없거니와 현실성들이 많이 떨어진다. 아, 그래도 초반부 카체이스는 나쁘지 않더라. 내가 워낙 그런 거 좋아하기도 하고. 그러나 나머지는 싹 다 용납불가. 체조 선수 출신 히트맨은 왜 두 주인공을 잡아다놓고도 아무 짓을 안 하는 건가. 잡아왔으면 고문을 해야지. 뭔가를 보여줬어야지. 하지만 어설픈 코미디 하느라 그 장면은 통째로 없느니만 못한 장면으로 전락해버렸다. MI6 소속 요원이 혼자서 거기 다 털어먹는 것도 웃기고, 후반부 모건의 서커스 배틀 역시 지루하고 또 지루했음. 그리고 무엇보다 클라이막스로써 큰 액션 씬이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던 타이밍에 그냥 말싸움 좀 투닥대다가 끝난 게 제일 빡침.

물론 영화가 뭘 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겠다. 두 '여성' 캐릭터들이 '남성'들의 전유물이라고 느껴지는 에스피오나지 장르 세계로 들어와 종횡무진 활약하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여성이라는 점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십분 활용하며 벌이는 페미니즘적 액션 활극. 의미는 좋다. 항상 여성들을 과소평가하는 남성 악당들이라든지, 당연히 남성일 줄 알았던 정복국의 수장이 여성이라든지 하는 점들은 분명히 의미 있다. 그러나 매번 이야기해왔듯,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페미니즘이든 세계 평화든 환경주의든 채식주의든 간에 일단 영화는 장르적으로 재미있어야만 한다. 영화 본연의 재미와 아름다움은 없는데 그저 메시지만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는 영화는 그저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일단 그 재미라는 게 없잖아. 장르적인 재미를 잊지 않으면서도 페미니즘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에이리언>이나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같은 영화들이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나를 찾는 스파이>가 내세우는 메시지는 진부하고 또 지루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 같은 장르에 비슷한 내용으로 멜리사 멕카시의 <스파이>도 있었잖아!

게다가 두 주인공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도 큰 문제다. 둘 다 민간인이면서 당황하는 기색 별로 없이 권총도 잘 쏘고 사격실력도 수준급이다. 뭐, 오락 많이 했으면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포인트는 그 이후다. 주인공은 엄연히 사람을 죽인 상태다. 그러나 그 죄책감은 깊게 묘사되지 않는다. 물론 코미디 장르니까 너무 또 어둡고 무겁게만 묘사할 필요는 없었겠지. 그럼에도 그게 큰 딜레마로써 작용하질 못하잖아. 심지어 우버 기사는 그녀들을 돕다가 맥없이 죽어버렸다. 근데 그 사람 시체에다 대고 "대신 별점 5점 드릴게요"라니. 아,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코미디여.

하여간에 이토록 재미없는 영화를 새벽 두 시부터 보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좀 화나네. 여성 영화일수록 더 잘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있으니까. 그래야 앞으로가 있으니까. 계속 이딴 식의 안일한 기획만 하다가는 여성 영화들의 길이 더 어두워질 것만 같아 심히 걱정된다.

덧글

  • 2020/09/10 09:5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20/09/22 20:3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잠본이 2020/09/12 01:40 # 답글

    거기에 더하여 쿠키장면에서 보여준 동양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 화룡점정을 찍었죠. 총체적 난국.
    컨셉은 참 좋았는데 실행이 영...
  • CINEKOON 2020/09/22 20:38 #

    저도 참 좋아하는 컨셉인데, 확실히 잘 살리기 어려운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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