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9 17:21

이제 그만 끝낼까 해 극장전 (신작)


찰리 카우프만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신작. 이 한 문장이 얼마나 위험한 문장인가 하면... 넷플릭스는 자사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드는 감독들에게 최대한의 창작적 자유를 주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근데 거기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찰리 카우츠만이 영화를 만든 거라고... 안 그래도 <시네도키 뉴욕>을 통해 난해함의 끝을 보여줬던 감독에게 전 제작비를 다 보태주며 하고 싶은대로 다 할 수 있게 놔둔 거라고...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그래도 미덕부터.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주연부터 조연들까지, 배우들의 연기는 전체적으로 다 좋은데다 조율도 잘 되어 있는 듯한 인상이다. 물론 토니 콜렛 같은 경우엔 <유전>에 이어 또 이런 영화인가 싶어 이미지 고정될까 좀 걱정되기는 한다. 근데 그거야 뭐 영화 외적 이야기고, 영화 안에서는 연기 다 잘했으니 그걸로 된 거지. 또, 촬영이 잘 된 느낌이고 프로덕션 디자인을 비롯해 미술 셋팅도 은은하니 괜찮다. 그리고...... 씨팔 그 외에는 좋다고 할 만한 게 없음.

찰리 카우프만 영화 아니랄까봐 이게 대체 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물론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면 끼워맞출 수도, 때려 맞추려면 때려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남자의 망상 같기도 하고, 잡념 같기도 하고. 뭐 그런 식으로의 해석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영화가 대중과 발맞춰 걸을 생각이 아예 없다보니 보는내내 지루하고 또 빡친다. 이것은 사토라레를 주인공으로 한 싸이코 드라마인가? 아니면 귀신 들린 집을 배경으로 한 오컬트 호러인가? 그도 아니면 두 남녀의 멜로 드라마? 우리가 시간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우릴 통과할 뿐인 크리스토퍼 놀란 식의 양자역학 스릴러? 씨팔 그래서 대체 뭔데?

아예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빡치는데,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기어코 댄스 장면을 삽입하기에 이른다. 인물들이 춤추는 장면. 난 그런 장면들을 좋아한다. 그게 댄스를 핵심으로 삼는 뮤지컬 영화이든, 아니면 그저 춤으로 인물들의 심리를 표현해내려는 표현주의적 영화이든 다 괜찮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도 댄스 장면은 예술적 허엉심만 거품처럼 가득 남은 미장센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나마 대중적인 <어스>에서도 그런 거 느꼈었는데 여기서도 이 지랄하니까 그냥 '나올 게 나왔구나'라는 생각 밖에 안 들더라.

어떤 사람들은 그저 이 영화를 이해하려 들지 말고 느끼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하더라. 나는 그거 진짜 엿같은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둘 중 하나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해시켜 주든지, 그게 싫으면 장르적인 재미라도 주든지. 근데 이 영화는 당연히 이해시키려는 노력 따위 1도 안 하고 있고, 장르적인 재미 역시 줄 생각이 1도 없어뵌다. 재미없고 구린 영화들 숱하게 봐왔지만, 이토록 무책임하기만 한 영화는 진짜 오랜만이다. 

핑백

  • DID U MISS ME ? : 우먼 인 윈도 2021-05-20 12:36:44 #

    ... 자에 앉기라도 한 듯 오른쪽 왼쪽으로 번갈아 기울어지는 카메라의 무빙은 그 자체로 미학적이다. 그리고 애나의 과거 미스테리가 풀리는 장면에서의 묘사도 &lt;이제 그만 끝낼까 해&gt;가 떠오르며 관객들을 차분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여러모로 잘 찍었다. 여기에 편집도 잘함. 건너편 집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갑자기 내 눈 앞으로 ... more

덧글

  • 로그온티어 2021/05/17 02:56 # 삭제 답글

    [어덥테이션]에서 침대에 누운 작가는 골몰합니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전개를 골몰하는 게 아닙니다. 글이 안 써지니 누워서 자기가 암 걸린 게 아닌 지 골몰하는 거죠. 저도 창작을 하지 않을 때에 그런 기억이 있어, 작가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상상을 펼치지 않으면 상상을 자신에게 펼치는 겁니다. 그것도 나쁜 쪽으로요.

    저는 이 작품을 그 [어덥테이션] 오프닝의 연장으로 바라봤습니다. 창의적 욕망을 펼치지 못한 자는 어떻게 될까? 무슨 생각으로 살까? 어떤 결말을 맞을까? 라는 질문. 꿈을 펼치지 못한 사람 중에 어떤 사람들은 공상 속에서 꿈을 이룹니다. [커미트먼트]에서 거울을 보며 상상인터뷰를 하는 지미처럼요. 그걸로 지금의 처참한 상황을 이겨내는 거죠. 저 또한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현실이 힘들면 머릿속에서 극을 만들거든요. 주인공을 나누어 지금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이 상황에 대해 관조하듯이 이야기를 나누게 만듭니다. 아는 지식이 많다면, 그 아는 지식들을 전부 꺼냅니다. 머릿속에서 이것저것 떠벌대다보면 고통은 감소해요. 다만 현실은 달라진 게 없죠.

    주인공 내면의 지적허영과 이루지 못한 꿈, 그 망상들의 유치함들과 현실과 공상의 괴리 끝에 내면에서 "가야 해요", "가지 말아야 해요"라고 끝을 고민하는 것들까지 전부 담겨져 있었습니다. 결말에서 노래부르는 건 뜬금없고 유치하면서 처절하게도 느껴졌습니다. 꿈이 있었지만 점차 늙어버려 끝내 현실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공상속에서 무언가를 이루는 것 뿐이니까요. 그것도 오리지널이 아닌, 남이 이룬 것을 공상하면서. 왜냐하면 그 장면이 [뷰티풀 마인드]에서 존 내쉬가 상타는 부분을 기괴한 뮤지컬로 재현한 듯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의식의 흐름을 알기 때문에 (왜냐하면 현실에서 많이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난해함으로 느껴지진 않았고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시종일관 팩폭을 맞는 것 같았습니다. "내면 속에서 투닥투닥하는 데 그치는 지적허영도 그만두고, 공상에서 이루는 꿈들도 그만두고. 저리 쓸쓸히 죽기 전에 뭐라도 좀 해라" 라고 온갖 팩폭에 피폭까지 당하는 느낌. 그래서 보고 나서도 그 서늘함에 잠못 이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몽상가들을 잘 아는 몽상가가 몽상가의 심리를 영상으로 고스란히 재현하며 몽상가들의 최후까지 보여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어요.
  • CINEKOON 2021/05/24 14:00 #

    그래서, 로그온티어님은 요즘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계신가요?

    저도 딴엔 작가 타이틀을 붙잡고 있는지라 뭘 쓰려고는 하는데 잘 안 써지네요.
    아무래도 날이 더워져서 그런가 봅니다. 아, 물론 날이 더워진지는 채 얼마 되지 않았지요.
    그러나 작가들의 핑계가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겨울엔 추워서 안 써지고, 봄에는 꽃가루 때문에 안 써지고...
  • 로그온티어 2021/06/06 06:06 # 삭제 답글

    언젠간 나오지 않을까요?

    [김도향의 조입시다]라는 책이 있어요. 똥꼬를 조이면 몸안에 기가 활성화되어서 열심히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300페이지 내내 설파하는 최고의 유사과학 코미디책입니다. 저 나름대로는, 환국 얘기보다 더 즐거웠어요. 심지어 저 책을 구한 게 쓰레기장이었습니다. 열 받아서 "다 안 할거야"라며 컴퓨터를 창 밖에 내다 던지고 나서, "컴퓨터라도 분리수거 해야지" 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터진 컴퓨터를 분리수거 하다가 폐지 버리는 곳에서 발견한 책입니다.

    할 것도 없겠다 읽었는데, 굉장히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 책 읽으며 공감가는 말이 두개 있었어요. 하나는 똥꼬를 조이면 똥이 안 나온다는 말이었고, 예술은 마음의 똥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오래전에, 제가 뭔가 해볼라고 했을 때 (...) 남들을 치열하게 설득하고 제작을 모집하던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 제가 제시한 작품들은 사실 저를 위한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살면서 겪은 상처를 반영하고 나름의 생각들과 나름 다양하다 생각되는 시선들을 마구 집어넣은 그런 것들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끔찍할 정도로 개인적이고 부끄러운 프로젝트 들이기도 해요. 내부자분들만 알고 세상에 나온 적은 없는 흑역사들이라 한편으로는 안심도 들지만 말입니다.

    여튼 제가 만들려던 것들과 지금도 가끔 쓰는 단편들을 가만히 곱씹어보면, 제 창작의 원천은 상처와 아쉬움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썼던 것들은 제 마음의 똥인 거죠. 세상에게서 받은 부정적인 인풋(input)들이 속에 쌓이고, 예술은 그 아웃풋(output)인 겁니다. 그리고 똥 못 싸면 변비 걸리고 속병 앓다 결국 죽잖아요. 이 말은 즉슨, 언젠가는 싸야 한단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쓴 거죠. "언젠가 나오겠지." 왜냐하면 글을 안 싸면 제가 병 걸리니까요.

    이상하고 짤막한 글들은 간간히 씁니다. 저는 정말 끔찍하게 스트레스 받으면 글을 쓰거나 아니면 그림을 그려버리는 매우 야만적인 습성이 있어서요. 요즘은 사기(...)성 글과 남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에 매료되었습니다. 슬픈 고백인 척하면서 황당한 이야기로 반전을 놓거나, 뜬금없이 자극적인 그림을 올려버립니다. 아슈발꿈도 자주 씁니다. 게임 제작에 참여했다는 글을 디테일한 고증을 더해 써놓고나선 마지막에 "꿈에서 깼다"라고 써버린 후에 열통(...)터진 유저분들의 반응을 즐기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쓰고 그리는 것들은 생산성있고 가치있는 작품들이 아닌 장난에 속합니다. 다만 저는 이젠 창작자가 아니라서 경쟁해야 하고 꼭 뭔갈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냥 흐르는 듯이 막 쓰고 시도할 수 있어서, 짤막한 창작들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부담감이 줄어드니까 오히려 장난치듯이 뭔가를 쓰고 즐기듯이 뭔가를 창작하게 된 겁니다. 똥 쌀 때, 부담이 엄습하면 똥이 잘 안 나오듯이 창작도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부담 가지면 마음의 똥이 안 나오는 겁니다.

    다만... 잘 싸는 것이 작가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닐 겁니다. 도움은 주겠죠. 그냥 한번 써봐요. "나는 작가 아님, 미친놈임. 어그로나 끌게 커뮤니티에 뭐라도 써야겠다"라면서 쓸데없는 이상한 이야기들을 마구 써버리는 겁니다. 혹시 모르죠. 그러다 등단할 수도 있습니다. 부기영화의 급소가격처럼요. 물론 등단을 웹툰에 대고 말하는 게 아님은 알지만...

    야한 거 쓰는 것도 도움이 되더라고요. 가장 최근에 쓴 야설은 ET스토리를 BL로 승화시킨 거였습니다. 쓰다보니 쩔더라고요. ET 스토리는 순수한 친구들의 이야기보다는 이룰 수 없는 금단의 사랑같은 소재로 써먹기 딱 좋으니까. 외계인의 신체구조를 좀 난해하게 비틀어서 일본풍의 그로테스크한 성교묘사를 써서 끔찍하게 에로틱한 묘사도 가능했습니다. 매우 흡족했어요.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창작물은 아니었지만요.

    마지막으로... 저는 작가가 아닙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부담이 적어 근본없고 아무렇게나 쓸 수 있어요. 작가가 되려는 분들 앞에서 별 글을 다 쓰며 약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전혀 타격입지 않을 수 있지요. 작가가 되지 않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요즘 서서히 체감하고 있습니다. 가장 주요한 변화는 쳇기였습니다. 제가 쳇기가 많았는데 작가포기선언을 한 이후로 쳇기가 많이 사라졌어요.
  • CINEKOON 2021/06/22 14:57 #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든 뭐든 간에 그걸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신다면 그건 야만적인 습성이 아니라 매우 문화적인 문명권 내의 행동 양식 아닌가요...?

    하여튼 긴 댓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제 3자라 드릴 수도 있는 말일 텐데, 쓰레기장에서 주우신 그 책은 어쩌면 방황하던 로그온티어 님에게 신적 존재가 슬며시 패스하고 간 어떤 계시가 아닐까요...? 마치 쓰레기장에서 알리타를 주웠던 이도 박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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