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일을 무려 네 번이나 미룬 영화. 그것도 모자랐는지 한국에서는 일주일 더 미뤄 총 다섯번을 미룬 영화. 원래라면 2018년 초에 봤어야 했던 영화. 근데 이런 건 다 부차적인 거고 영화외적인 이야기니까 그냥 싹 다 빼고 이야기하겠다.
하이컨셉은 진짜 좋은 편이다. <엑스맨> 본가 시리즈의 기운을 끌어 와 그걸로 폐쇄병동을 배경으로 한 호러를 만들겠다는 것. 그러면서도 주인공들을 모두 어린 청소년들로 구성해 성장 영화로써의 구색도 갖춰보겠다는 결심. 이것 자체는 굉장히 알맞은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따져보면 폭스의 <엑스맨> 시리즈는 언제나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였고, 때문에 성장 영화로써의 요소를 항상 끌어안고 있었다. 특히 브라이언 싱어가 연출했던 1편 같은 거 다시 떠올려보면, 첫키스로 당시 남자친구를 거의 죽게 만들 뻔했던 ‘로그’의 트라우마와 그 성장이 그 영화 중심이었거든. 물론 다 큰 어른인 ‘로건’이나 ‘찰스’도 나름의 성장을 했지. 그러나 2차 성징과 사춘기로 대변되는 진짜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더 확대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나에게 내내 있었거든.
그 점에서 영화는 충분히 흥미로운 편이다. 일단 인디언 보호구역 출신인 ‘대니’가 주인공이라는 점. 여기에 사고였지만 어쨌거나 친부를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휩싸여있는 ‘샘’.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도련님임에도 자신의 능력으로 여자친구를 죽게했던 로베르토. 그리고 간접적으로만 묘사되지만 왠지 아동성착취의 희생자였을 것만 같은 ‘일리야나’. 그리고 이 모든 설정들에 화룡점정을 찍는 ‘레인’도 있다. 레인은 동성애자다. 근데 또 독실한 가톨릭이기도 해. 거기서 오는 딜레마가 재미있다. 물론 이런 설정 퀴어 영화에서는 흔하게 다루는 소재지. 그러나 다른 영화도 아니고 이건 수퍼히어로 장르 대중 상업 영화잖나! 월드와이드 개봉을 추진하는 대중 액션 영화에서 수줍으면서도 풋풋한 레즈비언 키스가 나온다는 점은 정말이지 특기할만하다.
희망고문 좀 더 하자면, 호러 요소들도 씨앗은 잘 뿌려놨다고 생각한다. 물론 진짜 <컨저링> 시리즈나 <엑소시스트>처럼 본격 호러를 기대하면 안 되는 거고. 수퍼히어로 대중 영화 치고는 호러 요소가 괜찮다는 말. 주인공들을 괴롭히는 과거의 트라우마들로 그 호러를 성장 드라마적 요소와 결합했다는 점 역시 칭찬할 만하다. 미스테리를 품고 있던 인물인 ‘레예스’ 캐릭터가 너무 속보인다는 점은 좀 아깝지만, 그럼에도 그 주변 미스테리는 켜켜이 잘 쌓아놓은 편인 것 같다고.
근데 웃긴 게, 씨앗은 잘 뿌려놓고 정작 그걸 틔울 생각은 아예 안 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호러가 좋다는 게 아니다. 좋은 호러로 갈 수 있었을 좋은 호러 요소들은 나름 적재적소에 배치를 해놨다. 근데 딱 거기까지다. 영화가 발전을 안 한다. 성장 영화이면서 정작 영화는 성장을 안 한다. 뿌려놓기만 하고 묘사할 생각이 아예 없다. 기괴한 생김새로 등장한 과거의 망령들은 주인공들에 의해 그저 썰리고 박살날 뿐이다. 호러면 그 대상이 귀신이든 연쇄 살인마든 일단 좀 강하고 무서워야지. 그들의 위력이 주인공들을 가볍게 압도하는 정도로 시작을 해야 무서운 거지. 근데 이 영화 속 호러 대상들은 등장하면서부터 주인공들에게 발리는 모양새다. 그러다보니 주인공들이 대체 왜 무서워하는지를 모르겠음. 물론 정신적인 데미지는 다 들어갔겠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썰기 시작하면 다 털어먹을 수도 있겠던데.
성장 영화로써도 딱 거기까지 뿐이다. 사건을 통해 과거의 트라우마가 치료되고 거기서부터 벗어나는 인물들이 없다. 얕게나마 묘사되는 건 메인 주인공인 대니. 그러나 그 연출 역시도 매우 후지다는 게 문제. 결국 또 환상 속에서 아버지와 해후하는 걸로 때우는 거냐? 그리괴 나머지 친구들은 뭔데? 레인이랑 일리야나랑 샘이랑 로베르토는 뭔데? 얘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나? 아니면 좀 성장을 했나? 그딴 묘사가 이후로는 1도 없는 것이다.
수퍼히어로 팀업 무비로써도 실패한다. 우리는 이미 <어벤져스> 시리즈를 본 사람들 아닌가. 그 정도는 못해도 지들끼리 콤보 넣거나 연계기 쓰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서로 응원하는 장면이라도 있었어야지. 능력 출중한 애들을 다섯이나 모아놓고도 하나의 팀으로써는 쓰질 못한다. 물론 얘네 다 어리고 경험이 별로 없어서 엑스맨 팀만큼 수월하게 싸우긴 어렵단 거 잘 알아. 그럼 차라리 그런 점을 살렸어야지. 통제 불가한 면모를 넣어놓고 그걸 점점 통제해나가며 서로 협력하는 모습으로 영화의 컨셉을 이어갔어야지. 지금 버전의 클라이막스 전투는 흡사 프로레슬링을 방불케한다. 같이 레이드 뛰는 게 아니라 일 대 일로 계속 싸우다 지치거나 리타이어 하면 다음 선수로 교체되는 느낌임.
우려했던 것보다 나쁜 영화였던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즐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설정이 심어놓은 장대한 가능성들을, 영화는 모른체 해버리고야 만다. 이렇게 하다만 느낌으로 쓸 거였으면 왜 찍은 거고 또 멀 그리 미룬 거야. 차라리 2018년에 딱 나왔더라면 적당히 어느정도만 욕 먹고 퇴장했을 텐데. 더 갈 수 있었는데도 충분히 못 간 것 같은 영화라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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