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사 리메이크작이 개봉될 즈음하여 정말이지 오랜만에 다시 본 원작 애니메이션. 거의 20여년 만에 다시 본 것 같은데. 하여튼 성인되고 나서는 첫 관람이다.
일단 기획 자체가 참 대단했던 것 같다. 요즘이야 정치적 올바름이다 뭐다 해서 인종적, 국가적, 종교적, 문화적, 성적 등등의 기존 장벽들을 작품 내외에서 강제로라도 허무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판국이지만 이 영화가 나올 당시인 1998년만 해도 그런 흐름이 거의 없던 시절 아닌가. 물론 당시의 디즈니 입장에서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을 정조준하기 위한 상업적 전략 그런 것도 없지는 않았을 테지만, 하여튼 백인 일색의 디즈니 프린세스 라인업에 동양인이 들어갔다는 것부터가 당시로써는 꽤 센세이션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최초의 흑인 프린세스 데뷔도 <공주와 개구리>로 2010년이다. 거의 10여년이나 빨리 동양인이 디즈니 캐슬에 입성했다는 것 자체가 참 특기할만 하네.
근데 진짜 웃긴 게 같은 아시아 이웃으로서 그런 성과를 참 환영하면서도, 당시의 디즈니가 다른 텍스트도 아니고 대체 왜 이 이야기를 선택해 극화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당시엔 한국이라는 나라의 입지가 지금과 좀 달랐으니 그건 그러려니 하지만, 막말로 중국이나 일본의 어느 왕조를 택해 그냥 일반적인 공주 이야기로 풀어갔어도 충분히 먹히지 않았겠냐- 이 말이다. 허나 가족 영화의 명가 디즈니가 결국 픽한 건 전쟁 스토리였다. 남성 중심적이었던 제도권 내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남장을 해서라도 전쟁에 참전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 중국판 잔다르크 스토리. 이걸 픽했다는 게 제일 의외임.
물론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포인트는, 이 이야기가 어쩔 수 없이 전쟁 영화의 뼈대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디즈니는 가족 영화 중심 스튜디오로써 폭력이나 전쟁 등을 비롯한 유혈사태 묘사를 최대한 피해 왔던 회사다. 그런데 그랬던 회사가 갑자기 본격 전쟁 스토리를 움켜쥐었다는 것. 주인공이 동양인이었다는 것과 더불어 이 역시도 꽤 흥미로운 선택이다.
그러나 역시 디즈니의 한계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이야기의 핵심 뼈대가 노골적인 전쟁 이야기임에도 정작 영화는 그 전쟁 묘사를 최대한으로 피하려든다. 칼과 창, 활과 화살을 들고 서로 쏘아대며 싸우는 이야기를 펼치고 있음에도 정작 시뻘건 피가 분출되는 경우는 전혀 없다. 물론 안다. 그래도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이고, 아동층도 타겟으로 하고 있다는 거. 그러니까 출혈 묘사를 할 수는 없다는 거. 그건 이해된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강조하는 그 위기의 참혹함과 거대함에 비해서는 실질적인 묘사가 전무하다보니 주인공과 그 일행들이 처한 위태로운 상황이 별로 와닿지를 못한다. 중반부에 보면 그 넓은 중국땅을 지킬 군사가 오직 열댓명으로 밖에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눈사태 폭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봤다한들, 그래도 일국의 황제를 노리는 부대일진대 남은 멤버가 기껏해야 예닐곱명. 아무리 애니메이션이라해도 거기서부터는 몰입이 와장창 깨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긴, 어릴 땐 이거 보고 그런 생각 하나도 못해봤으니 그냥 내 머리가 그동안 큰 거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다보니 주제가를 비롯한 뮤지컬 넘버들에 있어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사실 주제가인 'Reflection'보다는 'Be a man'이 좀 더 좋더라. 그 곡이 흘러나오는 훈련 시퀀스의 몽타주도 좋고, 특유의 리듬감과 잘 어우러져 더 좋았던 것 같음. 무엇보다 일단 노래 자체가 좋고... 게다가 그 몽타주 끝나는 쇼트는 대놓고 중국스러워서 맘에 든다. 지역색이 강조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당시의 중국 사람들은 이 영화 보고 얼마나 뿌듯했을까.
이야기 내적으로 아쉬운 건, '뮬란'의 참전 동기가 좀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것. 물론 아버지를 위하는 효심도 알겠고, 국가를 위한 애국심도 알겠다. 무엇보다 이전부터 전형적인 여성성에 스스로가 갇히길 거부하고 있었다는 묘사도 존재하니 그것도 이해함.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목숨 걸고 나가야하는 전쟁터인데, 심지어 자신의 성 정체성까지 아군들에게 숨기고 살아야한다는 건데 그 일생일대의 결정을 하는 순간이 너무 빠르게 느껴진다. <쿵푸팬더> 오프닝에서 주인공 '포'의 덕력을 미리 깔고 들어갔던 것처럼, 이 영화도 초반부에 뮬란의 육체적 센스가 돋보이는 묘사 또는 대장부 다운 성격 등이 좀 더 보였으면 그래도 이해가 더 빨랐을 것 같다.
에디 머피의 '무슈'는 <알라딘>의 '지니' 포지션인데, 씨팔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건 지니와 완전 반대. 이 새끼는 대체 왜 따라나온 거지? 내가 뮬란이었으면 벌써 이 새끼 북어포 만들었을 텐데. 어그로도 겁나 잘 끌고 온갖 민폐는 다 저질러놓고도 남에게 떠미는 실력이 수준급. 근데 만약 무슈가 아니라 정말로 진짜 용이 수호신으로써 뮬란을 도와주는 이야기였다면 어땠을까? 진짜 용이라면 화염방사 능력도 훨씬 상위급일테고 덩치도 좋았을 테니 뮬란이 타고 날아다닐 수 있었겠지? 거의 중국땅의 나즈굴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무슈 이 새끼 때문에 그게 안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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