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외적으로 굉장히 많은 논란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작품. 개인적으로는 창작자와 그가 만든 예술품 사이를 단순하게 딱 이분법으로 갈라서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이번 <뮬란> 역시도 봐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이 무척이나 많았다. 뭐, 물론 애초부터 대륙의 인해전술만을 믿고 노골적으로 차이나 머니 뽑아먹으려 만든 영화였기에 나 한 명이 보든 말든 디즈니 입장에서야 별 신경 안 썼겠지만. 하여튼 나름 고민하다가 끝내 보게 된 작품. 근데, 외적 논란들 다 떼고 봐도 그냥 엉성하게 못 만든 영화 아닌가 싶더라.
내 안에 감춘 스포가 눈을 뜬다!
원작이 되는 애니메이션과 비교해 가장 나쁜 각색 포인트는, 주인공 '뮬란'의 태생적 능력에 관한 것이다. 애니메이션 속 뮬란은 그 자체로 굳은 심지와 용기를 갖고 있던 소녀였지만, 그럼에도 한낱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했다.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심 하나는 인정하겠으나, 그렇다고 그녀가 일종의 '선택받은 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영화에 또 하나의 감동이 더해졌다 생각했다. 평범함 사이에서 용기와 믿음으로 틔워낸 영웅심. 그게 바로 원작 속 뮬란의 참된 모습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번 실사 리메이크 속 뮬란은 <매트릭스>의 '네오'나 <스타워즈>의 '루크 스카이워커'가 그랬듯 이른바 '선택받은 자'로서 군림한다. 원작에서도 언급되지 않던 '기'라는 동양적 개념이 <스타워즈> 시리즈의 포스 마냥 강조된다. 뮬란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예를 비롯한 여러 육체적 활동에 능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남들이 인형을 가지고 놀았을 어린 시기에 동네 지붕 위를 아크로바틱으로 누빈다. 현실성은 일단 둘째치고, 애초부터 선택받은 영웅으로서 태어났다는 점이 영화의 개연성과 주제적 맥락을 흐린다.
이번 영화의 주된 메시지 역시 기존 디즈니 영화들 기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온전히 진실된 나로서 살아가라는 것. 그리고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살고 있던 여성 주인공들을 통해 여성도 할 수 있다-를 강조하는 것. 물론 둘 다 좋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메시지지. 그러나 바로 그 메시지가 뮬란의 '선택받은 자' 설정에 의해 죄다 와장창 깨져나간다. 평범한 여성에 불과했으나 용기와 지혜로 한 나라를 구해 세상의 편견을 바로 잡았던 원작의 뮬란. 그러나 이번 실사 리메이크에 따르면, 선천적으로 무엇인가를 갖고 태어나야만 입신양명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나와 같은 다른 여자들 일생이 비참하든 말든 알게 뭐람, 나만 출세하면 됐지.
군대라는 남성중심적 사회 안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긴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써도 맹맹하다. 애초부터 잘나게 태어났으니 내 선천적 능력을 숨기면 숨겼지, 고된 훈련을 받으며 고생하거나 힘들어하는 묘사 따위가 대부분 다 날아간 것이다. 원작에서의 상징적 훈련은 높은 깃대에 꽂힌 화살을 수거해오는 것이었지. 모든 남자들이 오직 근력만으로 승부를 볼 때, 원작의 뮬란은 도구와 잔꾀를 이용해서 그 훈련을 성공해냈다. 그러나 이번 실사 리메이크에서 보여지는 훈련의 정점은 물 양동이 지고 높은 언덕 오르기. 이건 지혜나 잔꾀 따위가 통하지 않는 훈련이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근력과 체력 테스트인 것이다. 그리고 뮬란은 이를 손쉽게 통과 해낸다. 씨발, 역시 나라를 구하려면 두뇌보다 근지구력을 길러야한단 이야기인가.
원작 속 에디 머피의 '무슈'를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잘라낸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공리의 웬 마녀 캐릭터다. 공리의 연기 자체는 좋았다. 워낙 오랜만에 보기도 했고, 특유의 그 섹시함과 노련미가 돋보이더라. 그러나 원작에 없었으면서 굳이 만든 캐릭터치고는 너무 얇기만 하다. 마녀의 요지는, 본인처럼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이 세상이 쾌적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발 뻗고 잘 수 있는 세상을 구현해내자-라는 다소 혁명적 태도다. 당연히 의도는 좋아. 같은 여성인데다 능력도 비슷하고, 그러면서도 서로 취하는 입장마저 다르니 주인공인 뮬란과 상호작용을 펼치기에 썩 괜찮은 캐릭터지. 그러나 마녀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남성 악역인 '보리 칸'의 부하로서만 기능한다. 아, 이것도 성공하기 위해선 남자 곁에 붙어야 한다-는 마녀의 입장과 온전한 나로서 성공을 해야 의미가 있다-의 뮬란 입장을 대비하기 위해서인가? 아니. 그런 거 채 하기도 전에 마녀가 죽어버린다. 심지어 뮬란을 위해 뜬금없이 희생하면서 죽음. 주인공을 위해 화살을 대신 맞는 조력자의 모습...... 이미 골백번은 더 본 것만 같은 이 장면이 나오는 순간 안 그래도 벙쪘던 내가 더 벙찌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미덕도 있다. 요즘 중국에서도 잘 안 만들어지는 무협 장르 영화적 감성이 할리우드 메인 스트림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 속에 깃들어있었다는 점. 그래도 서양에서 만든 디즈니 영화이니 와이어 액션 같은 건 안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걸 그냥 밀고 나가더라. 그 모습은 좋았다. 허풍 좀 보태면 이게 니키 카로 영화인지 장예모 영화인지 살짝 헷갈릴 수도 있겠던데?
지혜 대신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무소불위의 힘만으로 모두를 다 털어먹겠다는 고압적이고 뻔뻔한 태도. 근데 그게 비단 주인공의 모습에서 그치지 않고, 어째 중국이라는 나라가 요새 취하고 있는 스탠스와도 겹쳐져 있는 것 같아 괜시리 더 거부감만 들었다. 이딴 식으로 만들 거면 대체 왜 만든 거야, 디즈니 이 새끼들아.
뱀발 - 견자단 자체는 너무 멋진 배우인 거 맞는데... 나름 총사령관 주제에 훈련병 두 놈이 투닥 거리고 있을 때 불현듯 나타나 화려한 무공으로 다 제압하는 장면이 너무 깼다. 사단장이 아직 훈련소 입소 하지도 않은 장병들 앞에서 절대무공 보여주며 허세부리는 느낌이었음. 요다가 스카이워커 만나자마자 광선검으로 밸리댄스 추는 느낌이었다고 해야하나.
덧글
dj898 2020/09/23 11:58 #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