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3 16:22

머니볼, 2011 대여점 (구작)


전세계 야구 본좌들이 모여드는 메이저 리그를 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정작 야구라는 스포츠 종목 자체보다는 그 이면의 리더십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말하고 있는 영화. 일명 스포츠 없는 스포츠 영화로 야구 없는 야구 영화. <카포티>와 <폭스캐처>에서 그랬듯, 베넷 밀러는 다수로부터 유리된 듯한 상황 속의 인물이 느끼는 고독과 내적 갈등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특유의 쓸쓸한 감성이 폭발하는 영화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빌리'는 덩그러니 혼자 있는 시간만으로 그 자신의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납득시킨다. 영화의 오프닝도 빈 야구 경기장에 홀로 앉아있는 그의 모습으로 시작되고, 엔딩 역시도 수미상관으로 오로지 그의 몫이다. 이른바 그 남자의 뒷모습에서 시작해 옆모습으로 끝나는 영화. 영화를 같이 본 누군가는 말했다. 뻔하고 뻔한 한국 영화였다면 인물의 쓸쓸함을 표현해내는데에 분명히 또 담배라는 소품을 썼을 거라고. 흡연하는 장면으로 그 인물의 외로움과 고립감을 표현해냈을 거라고. 그러나 <머니볼>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구 밀도를 확 낮춰 넓디 넓은 공간에 홀로 존재하는 빌리의 모습을 통해 그런 서정적 쓸쓸함이 잘 묻어나온다. 베넷 밀러는 이런 걸 참 잘한다.

영화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무시하더라도, 변화를 위한 도전이라면 앞뒤 보지 않고 스스로만을 믿을 것. 그리고 때로는, 스스로에게 조금만 더 관대해질 것. 어떻게 보면 전자는 리더와 멘토의 덕목이고, 후자는 평사원과 멘티의 덕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공인 빌리는 그 둘을 모두 겪는다. 그는 현재 한 야구팀을 이끄는 단장이지만, 과거엔 그 역시 메이저 리그 선수였거든. 때문에 그는 안다. 단장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길에 얼마나 많은 방지턱들이 존재하는지를. 그리고 프로모터와 스카우터들이 에둘러서 표현하는 그 값싼 동정심이 선수들에겐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때문에 리더로서, 단장의 모습으로서의 빌리는 한없이 믿음과 곁을 주고 싶은 인물처럼 보인다. 우리의 방식을 믿지 않는 남들에게 구태여 그것을 설명하려 들지 말라는 말. 카리스마 있게 남들을 휘어잡으면서도 진정한 역지사지의 자세로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 모습. 그러면서도 브래드 피트의 전매특허 연기라 할 수 있을 끊임없는 취식 연기로 인간적인 호감까지 보여주는 사람. 여러 면에서 보아도 빌리 빈은 썩 괜찮은 리더다. 

하지만 내 맘을 더 움직였던 것은 홈런을 치고도 본인이 홈런을 쳤는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은유였다. 스스로에게 조금만 더 관대해질 것. 자신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조금은 자기를 믿어볼 것. 영화의 프롤로그를 여는 미키 맨틀의 명언도 바로 그것이었고, 영화를 끝마칠 무렵 '피터'가 빌리에게 반복해 보여줬던 판독 비디오도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영화의 엔딩에서 빌리의 눈망울을 나직하게 채우는 눈물은 슬픔의 그것이 아니라 해소의 그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빌리가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하기도 했지 않나, 자긴 과거의 너를 산 게 아니라 현재의 너를 산 것이라고. 우리 모두가 그렇다. 과거에 했던 실패는 중요치 않다. 그저 성장의 밑거름 정도로만 쓰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재에 있다. 그러니까 때로는 그냥, 이 쇼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개봉 즈음에 극장에서 처음 본 이후 거의 2,3년 주기로 다시 보고 있는 영화인데 어째 볼 때마다 더 좋아지는 것 같다. 베넷 밀러는 이 영화 이후 <폭스캐처>까지 총 세 편의 장편 영화를 연출했다. 그런데 <폭스캐처>가 2014년 영화였으니, 그의 공백기도 어느새 6여년이 되었네. 어디서 뭘하고 있든지 열심이겠지만, 하루 빨리 그가 현역 감독으로 복귀 했으면 좋겠다. 어서 돌아와 또 누군가의 내적 전쟁을 부드럽게 후벼팠으면 좋겠다.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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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페이토 2020/09/23 23:03 # 답글

    책은 정말 재밌게 읽었었는데 영화는 단순히 한편의 휴먼드라마(?)여서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살짝 아쉬웠었던... 기억이 맞다면, 자기가 할일을 다 해놓고는 정작 경기결과는 쌩 무시하는 수준에 도달한 빌리 빈의 진인사대천명 정신(?)이 오래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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