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고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들의 물결 사이에서, 밀리 바비 브라운 & 헨리 카빌이라는 걸출한 캐스팅으로 나의 눈길을 사로 잡았던 영화. 주인공은 다름아닌 바로 그 '셜록 홈즈'의 여동생. 아직 미성년자이기까지 하니, 딱 봐도 추리 미스테리 장르와 <구니스> 식의 모험 영화를 접붙인 결과물이겠거니 싶었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들이기도 하고.
이보게 왓슨, 스포일러는 그만두게!
영화는 어린 탐정을 주인공으로 두고 무려 두 개의 미스테리를 풀어낸다. 하나는 사라져버린 주인공 어머니의 행방을 쫓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온 세상이 다 쫓고 있는 듯한 어린 후작 하나를 찾고 또 보호하는 것. 아니, 그럼 상식적으로 이 두 개의 미스테리가 느슨하게나마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장르적으로 맞는 게 아냐? 영화는 각기다른 미스테리 두 개를 그냥 툭 던져놓고 이거 해결하다가 또 저거 해결하느라 바쁘다.
물론 영화의 주제적 측면에서 그 두 미스테리는 서로 관계가 있다. 어머니는 여성 참정권 운동의 맨 앞 선두에 서서 세상을 바꾸려 하는 인물이며, 쫓고 또 쫓기는 그 후작은 자신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여성 참정권을 위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서로 내용적으로나 추리적으로 연결되지는 못하면서 앙상하게 메시지 하나만을 공유하고 있는 이 듀얼 코어 두 개의 미스테리가 바로 그 때문에 더 허접하고 추레해보인다. 결국 이야기나 장르적 재미 다 떠나서 오직 메시지 하나만을 무조건적으로 염두에 둔채 쓴 시나리오라는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 당시의 여성 참정권 운동은 분명 옳은 일이었고, 여성들이 온전히 자신만의 삶을 똑바로 세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도 응당하다. 그러나 여성의 미래는 여성 스스로가 세워야한다-라고 외치는 영화치고 이 영화는 너무나 많이 셜록 홈즈의 이름을 팔아먹는다. 애초 투자도 셜록 홈즈라는 이름 값 때문에 받았을 것이고, 최종 소비자인 나 역시도 '셜록 홈즈의 동생도 명탐정이다!'라는 캐치프라이즈에 엮여 보게 된 것이니까. 심지어 주인공 조차도 셜록 홈즈의 동생이라는 꼬리표를 스스로 떼기는 커녕 오히려 이용한다. 쉽게 침투할 수 없는 장소에 오빠의 이름을 팔아 난입하지 않나.
그리고 언제나 말했듯, 영화는 메시지보다 장르적 재미가 우선이어야 한다. 이 영화의 장르가 무엇인가? 추리 미스테리 아닌가. 그럼 그걸 먼저 제대로 했어야지. 그걸 삐까뻔쩍하게 먼저 제대로 해놨으면, 그 뒤에 어떤 메시지가 붙었든 내 상관할 바 아니겠지. 오히려 더 좋았겠지. 그러나 이 영화의 추리 미스테리적 요소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대도시 런던 어딘가로 도망친 남자 아이를 어떻게 찾아야할까. 우리의 주인공 '에놀라'는 그 꼬마가 살았던 집으로 향한다. 그래, 여기까지는 상식적인 전개다. 그리고 에놀라는 그 꼬마가 즐겨보던 책을 찾아낸다. 그 다음엔? 어라? 책 사이에 꽃갈피가 끼워져있네? 이 소년은 꽃을 좋아하는 소년이니 런던 꽃시장에 가면 찾을 수 있겠구나! 씨발 진짜 내 어이가 없어서.
영화가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다 이딴 식이다. 제대로된 추리라는 걸 안하고 무슨 애들 동화책 마냥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아, 에놀라는 주짓수를 비롯한 싸움도 잘하는데, 심지어 그걸로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성인 남성 킬러를 단숨에 꺾는다! 이게 말이 되냐고... 꼬맹이가 주인공이면 체술 같은 건 좀 저쪽으로 치워두고 다른 요소로 승부를 봤어야지... 심지어 그 주짓수 기술로 주인공의 성장마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 타이밍과 결과가 모두 예측가능의 뻔한 형태라 별 재미가 없음.
더불어 이런 영화에서 항상 중요한 것이, 범인이 누구인지와 그 동기가 무엇인지다. 영화는 바로 거기에서도 실패 하고야 만다. 헷갈리게 조금의 트릭을 심어두기는 했지만 눈치만 좀 빠르다면 중반부부터는 누가 범인인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전개를 갖췄다. 근데 더 심각한 건 그 범인의 범죄동기다! 친할머니라는 작자가 친손자를 살해하려고 들적에는 뭔가 그 입장에서 합당하고 또 절박한 이유가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 어찌되었든 친족 살해인 건데 그걸 관객들이 납득할만한 설명과 묘사로 보충을 했어야지. 지금 버전은 너무 간추려있는데다 뻔해서 어이가 없다. 기껏 검거 했더니 손자가 여성 참정권을 옹호하려들어 죽이려 했던 거라고? 씨발 그 설명도 딱 한 줄뿐이고.
생각해보면 어머니 관련된 미스테리는 주인공이 한 노력과 별개로 저절로 해결되어버렸다. 막판에 엄마가 그냥 찾아와버림. 그리고 한다는 소리가 "너무 위험해서 너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떠났다"라는 게 더 충격. 그럴 거면 왜 그렇게 힌트를 남겼던 건데요... 그렇게 위험하면서 왜 딸이 폭탄 창고에까지 드나들 수 있게 힌트 준 건데요...
결국 둘 중 하나다.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위해 아예 정면 돌격하는 것. 똑같이 헬레나 본햄 카터 나왔던 <서프러제트>처럼. 아니면 장르적 재미 아래에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교묘히 숨겨 전달하는 것. 이미 골백번도 넘게 말한 것 같지만 이 방면으로는 이미 <에이리언>이나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같은 훌륭한 레퍼런스들이 있다. <에놀라 홈즈> 역시 이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둘 중 무엇도 선택해내지 못했다. 장르적 재미는 휘발되고, 여기에 메시지만 앙상하게 남은 전형적인 프로파간다 영화가 되어버렸다. 이딴 식으로 만들거면 그냥 아무 것도 하지를 마라고, 차라리.
덧글
로그온 2020/10/21 00:26 # 답글
페미니즘적 성향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에는 동의하고, 에놀라가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주제를 그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문제는 극중 에놀라가 한 것은 여정을 시작한 것 빼고는 없단 겁니다. 에놀라가 스스로 답을 찾았다는 생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중요한 일들 거의 대부분은 주변 남주가 거의 다하고, 주인공이 스스로 매듭짓는 부분을 빼먹어 놓고는 페미니즘을 주제로 세우다니.
풍경이나 코미니 연출은 오랜만에 옛날 TV영화를 보는 것 같아서 추억돋긴 한데, 다르게 말하자면 좀 촌스럽다고 해야겠군요. 그 뭔가... 심히 올드함이라는 것이 있어요. 어디서 많이 본 스타일이 곳곳에 박혀있어. 그래서 이래저래 불만이 슬쩍 올라왔지만, 어차피 극장개봉 영화가 아니니까 큰 기대 안 해서 결과적으로는 즐겁게 보았습니다. 저는 넷플릭스 작품은 거진 TV영화처럼 보기에 큰 기대를 안 하고 보는데,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넷플릭스 영화는 정말 큰 기대를 안 하고 보는 게 좋더라고요.
하나만 빼고요. 최근에 본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정말 괜찮았습니다.
CINEKOON 2020/10/23 22:14 #
CINEKOON 2020/10/23 2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