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0 18:12

번 애프터 리딩, 2008 대여점 (구작)


코엔 형제가 희대의 달변가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별 거 없는 이런 상황 속으로 별 볼 일 없는 이런 인물들을 끌어 들이며 능수능란한 솜씨로 이 이야기를 매듭짓는 꼴을 보니 과연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 브레이브>와 <카우보이의 노래>를 통해 웨스턴 속 전형적 영웅주의를 제거했던 코엔 형제. 이번엔 그게 <007>로 대표되는 에스피오나지 장르다. 그래, 사실 에스피오나지 장르는 웨스턴 보다 더 영웅주의에 대한 강박이 심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 본드'든, '제이슨 본'이든, '이단 헌트'든. 언제나 멋진 수퍼 스파이 영웅들이 등장해 세상을 구하는 게 일상인 장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에스피오나지 장르 역시도 코엔 형제의 해부절제술을 벗어날 순 없었나보다. <번 애프터 리딩>은 영웅이기는 커녕 순 얼간이들로만 가득 차 있는 요상한 첩보 영화다.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주인공격이라 할 수 있을 '린다'가 '채드'와 합심해 팔아먹으려 열을 올리는 이른바 기밀문서는 사실 은퇴한 CIA 퇴물 '오스본 콕스'의 자서전이었다. 더불어 가계부 조금. 모든 이야기는 오스본 콕스의 CIA 사퇴라고 쓰고 해고로 읽는다로 일어난 셈이지만, 결국 그 기밀문서로 둔갑한 자서전은 영화 전체로 봤을 때 맥거핀일 뿐인 것. 그저 코엔 형제는 한심한 상황에 각자의 욕망을 갖고 얽혀버린 얼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 

린다의 첫 등장이 재미있다. 그녀는 성형 전문 병원에서 자신의 외양으로 견적받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첫 소개된다. 그녀는 첫 등장부터 스스로가 과시적인 동시에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그래서 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수 밖에 없는 인물로 소개된다. 지금의 내가 아닌 더 나은 나로 살아가고 싶었던 여자. 애초 그녀가 이 첩보전에 뛰어든 이유도 성형 수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고, 점점 그 미션에 집착하는 것도 평범한 현재의 삶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근데 그 이유가 무척이나 세속적인데에 반해, 정작 결말을 통해 욕망을 해소하는 유일한 사람은 결국 그녀다. 첩보전 한 가운데에서 딱히 실력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바로 여기서 코엔 형제의 속내가 다시 한 번 읽힌다. 형제라는 이 인간들은 인생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매번 말하는 사내들이다. 코엔 형제의 세계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건 결국 다 운빨로 결정된다. 당신이 열심히 살았든 게으름 피우며 살았든 그 따위 것들은 웃긴 머리를 한 안톤 쉬거라는 남자를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 다 쓸데없어 지는기라. 네가 일생의 사랑을 만났든 아니든 그 따위 것들은 서부 한 가운데에서 아파치 부족을 마주치게 되면 다 알 바 아닌 게 되는 거라고. 바로 그런 점에서 코엔 형제는 존나 잔인하다.

연기 진짜 다 좋은데, 이 영화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브래드 피트 연기는 안 짚고 넘어갈 수가 없다. 병신 얼간이 연기 겁나 잘해. 내가 본 얼간이 중에 가장 찐이야. 근데 또 존나 슬픈 건 그런 연기하고 있어도 브래드 피트는 브래드 피트라는 것이다. 그는 존나 잘생긴 병신이라는 것이다. 씨팔...

인공위성의 시점으로 오프닝을 열었다는 점에서 '오, 코엔 형제 영화치고 운명론에 입각한 영화인 건가?' 싶었지만 결국 그 수미상관 엔딩까지 보고나면 '운명론은 개뿔, 그냥 이 모든 게 다 쓸데 없었다는 표현이구만'으로 돌아서게 되는 영화. 설마- 싶었지만 역시나-로 끝나는 영화. 코엔은 코엔인 영화. <번 애프터 리딩>은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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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 2020/10/21 00:38 # 답글

    "브래드 피트 연기는 안 짚고 넘어갈 수가 없다. 병신 얼간이 연기 겁나 잘해. 내가 본 얼간이 중에 가장 찐이야. 근데 또 존나 슬픈 건 그런 연기하고 있어도 브래드 피트는 브래드 피트라는 것이다. 그는 존나 잘생긴 병신이라는 것이다. 씨팔..."

    크으으 이 찰지게 옳은 문장에 찰지게 격렬한 동의하고 갑니다.
  • CINEKOON 2020/10/23 22:14 #

    그는 너무나 잘생긴 병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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