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0 17:32

소리도 없이 극장전 (신작)


생활형 유괴범들의 일상 밀착 카메라 방송이 이런 것일까. 시장통에서 30개들이 계란을 팔며 부업으론 범죄 조직의 살인 뒷처리를 맡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유사부자 관계의 두 남자. 이 조용하고 또 예의바른 두 남자 사이에 예상치도 못한 한 소녀가 걸어들어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스포도 있이!


전혀 다른 장르의 전혀 다른 영화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바로 딱 떠오른 영화는 다름아닌 <존 윅>이었다. 1편에서 그런 언급 있잖아. '존 윅'이 죽사발 내놓은 킬러 시체들 처리해주려고 뒷처리 전담반 왔던 거. 금화 몇 닢 받아먹고는 시체처리까지 성실하게 임했던 그 남자들. <존 윅> 보던 당시에도 참 신선하고 재미있는 설정이라 생각했었는데, 시골을 배경으로해 한국적으로 로컬라이징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같은 직업군을 다룬 영화 아닌가. 역시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얼른 채가는 게 인지상정인 것이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전반부까지만 봤을 때. 영화의 신선함에 장르 영화의 팬으로서 활짝 웃게 된다. 평범한 소시민들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악행. 그리고 마치 라이언 존슨의 <스타워즈>마냥 이리저리 꺾어대는 비틀기 신공. 캐릭터의 설정부터 상황의 묘사까지 전반적으로 신선하다는 느낌이 가득하다. 유괴한 소녀의 보관을 명했던 보스는 바로 다음 씬에 반 피떡이 된 상태로 등장해 두 주인공의 상사에서 물건으로 그 가치가 급락한다. 유괴당한 소녀는 징징대지 않고 전략적으로 행동하며 극중 인물들 중 가장 성숙한 태도를 보인다. 여기에 초보 유괴범으로서의 주인공들 모습을 보면 자연스레 비웃음이 흘러나오기도. 하여튼 걸작이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영화의 전반부만 놓고보면 확실히 새로운 게 사실이다. 전반부만 놓고보면.

중반부의 어느 기점에 이르면 영화가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탄다. 유재명이 연기한 '창복'이 소녀의 몸값을 전달받는 바로 그 장면. 돈 가방 들고는 혼자서 지레 겁먹고 시장 이 곳 저 곳을 헐레벌떡 싸돌아다니다가 종국에는 제 발에 걸려 넘어진다. 그리고 바로 사망. 뭐, 진짜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영화가 언급해주지 않지만 그 뒤로 '편안히 하늘로'라는 멘션까지 달아줬으니 이건 그냥 확인사살 아니겠나.

바로 거기서부터 영화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이른바 '편안히 하늘로' 장면의 유머는 그 자체로 재미있다. 나야 원래부터 이런 B급 유머나 병맛 개그 좋아하는 편이니까. 문제는 이 영화의 전반부에 그런 B급 톤이 전혀 없었다는 거다. 전반부 역시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들이 들어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블랙 코미디와 병맛 개그 사이의 벽은 생각보다 높다. 전혀 그런 톤이 아니었던 영화에서 갑자기 돌출되는 병맛 개그. 여기서부터 영화의 톤 앤 매너가 종잡을 수 없어진다. 

유괴당한 소녀는 짐짓 탈출 하고싶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탈출을 실행한 뒤 유아인의 '태인'을 만나자 스탠스가 180도 돌변한다. 방금까지는 그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으면서, 다시 태인을 만나니 얼른 그 집으로 돌아가자 말한다. 물론 여기엔 여러가지 해석이 따를 수 있다. 어린 아이니까 변덕이 끓어오른 것 아니냐. 또는 그 무섭게 생긴 자전거 아저씨를 보곤 조금이라도 익숙한 태인과 그 집이 다시 그리워진 것 아니냐. 또는 어쨌거나 물리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태인을 다시 만났으니 속마음은 그렇지 않아도 오로지 살기 위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척 했던 거 아니겠냐- 등등. 그러나 이는 다시 말하면 그만큼 이 소녀의 그 행동이 명확하지 않았다는 반증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길 수 없는 태인을 만났으니 일단 다시 돌아가자고 한거라고? 그럼 그 집으로 돌아가서 경찰을 만났을 때는 잠깐이라도 그 경찰 편을 드는 등의 묘사가 있었어야지. 그런 거 전혀 없지 않나. 심지어 죽은 것처럼 보인 그 경찰을 묻으라고 태인에게 삽도 전해주잖아. 뭐야, 이거?

덩달아 메시지도 희미 해진다. 이건 악의 일상화를 말하는 영화인 건가? 아냐, 그것보단 인간을 인간 답게 하는 것들 중 '교육'의 무서움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아니면 그냥 스톡홀름 증후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 마지막에 그들 모두가 행복하게 지냈던 한 때를 보여주는 에필로그가 있잖아. 그럼 '어떤 관계도 영원하지 않다'에 대한 이야기인 거 아닐까? 씨팔, 그 중 무엇도 선명하게 남지 않는다. 죽은 줄 알았던 경찰이 매장된 흙을 뚫고 나와 혼자 <데드 돈 다이>를 찍는 순간 역시도 최악이다. 이상한 싸구려 유머 톤이 영화의 후반부를 덩달아 싸그리 망쳐 놓는다. 이러다보니 캐릭터들의 설정마저도 그저 소비될 뿐이다. 태인은 왜 말을 못하는가? 태인은 왜 여동생과 단 둘이서만 살고 있는가? 있어보이게끔 포장만 하면 뭘해, 영화가 그에 대한 대답을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데. 

영화가 스스로 마침표를 찍어주기만 했더라면 좀 더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관객으로서 종잡을 수 없는 영화가 나와버린 셈이다. 전반부의 패기를 후반부에까지 관철 시켰더라면 어땠을까. 이상하게 내 마음 속에 물음표만을 가득 남기고 혼자 끝나버린 영화의 느낌이다. 

덧글

  • 로그온 2020/10/21 00:11 # 답글

    세차장에서 일하다가, 살인현장 청소해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적이 있어요. 차에서 죽인 뒤에 시체는 화장터에서 뒷돈 주고 몰래 태우고 살인현장이 된 차는 세차장에서 치워주는 거죠. (그 차는 중고로 되팔거나 재활용하고요) 조직의 말단에서 이런 일을 하던 사람들이 여느 때처럼 차를 청소하다가 트렁크에서 몰래 살아있던 생존자를 발견하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이야기를 상상한 적이 있어요. 생각하다가 뭔가 쩌는 게 안 보여서 더 안 쓰고 말았는데, 대충 단편으로는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 트레일러 봤을 때, 제가 상상했던 거랑 비슷한 소재길래, 내가 상상한 걸 화면으로 보는 느낌이 나는 것 같아서 기대했어요.

    엄청나게 기대했는데 내용을 읽다보니 어으;;;;
    아니 [리얼] 이후로 정신 못 차린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 걸까요;;
  • CINEKOON 2020/10/23 22:14 #

    역시 좋은 건 먼저 채가는 게 답인 겁니다. 냉혹한 세상만사의 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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