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적 배경이 1990년대라는 것도 중요하고, 영화 산업적으론 여성 인물 중심 서사라는 점 역시 특별하다. 그러나 내게 있어 이 영화가 가장 감동적이었던 지점은, 공동체적 연대와 개인적 양심으로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와 한계를 부술 수 있다 믿는 그 나이브함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뻔하지만 내가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다. 어설픈 비전문가 일반인들이 모여 작당모의를 통해 장르적 전문가의 몫을 해내야한다는 설정. 영화의 중심 축인 '자영'과 '보람', '유나'는 그저 대기업의 부속품들일 뿐이었다. 커피 타는 것과 산수를 잘한다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것 없는 일반인들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음모 앞에 이들은 기어코 탐정으로 분한다. 그러면서 벌어지는 우당탕탕한 에피소드들의 나열. 이런 이야기들을 내가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영화 자체가 담백하고 귀엽게 그걸 잘 그리고 있기 때문에 좋았다.
그와중에 영화가 기어코 지켜내려는 건 연대의 힘이다. 전형적이고 좀 오그라드는 예시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직접 언급되는 멘트니 개미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겠지. 한 마리의 개미는 그저 작고 나약한 벌레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미들이 모여 하나의 군체를 이루게 되면 그 이후부터는 결코 그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아무래도 여성 중심 서사의 영화이고 요즘 충무로에서 난다 긴다 하는 젊은 여성 배우들을 다 끌어다 캐스팅한 모양새이니 이 메시지의 초점 자체는 오직 '여성'들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때문에 당신은 '또 연대의 이야기냐'라고 볼멘 소리를 내지를 수도 있다. 여성과 장애인, 동성애자와 외국인 등의 이른바 사회적 소수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요즈음 영화들 대부분이 마치 담합이라도 한 듯 모두 그 끝에 가서는 연대의 필요성을 목놓아 외치고 있는 형국이니 말이다. 어쩌면 당신은 여기에 질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의견은 일견 타당하다. 나 역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그 뻔하디 뻔한 레퍼런스만 줄기차게 외치고 있는 영화였다면 조금 질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연대의 힘'과 더불어 그와는 전혀 반대되는 지점에서 응당 존재해야만 하는 어떠한 '다른 힘'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힘'이다. 거대한 체제와 세력과 존재 앞에서 결코 굽히지 말아야 할 개개인의 신념. "정해져있는 세상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진 마"라고 나직하게 말하는 극중 인물의 대사. 그것은 그저 당시 사회적 약자들이었던 여성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그 대사의 주인공인 '봉현철' 부장 역시 남성임에도 마찬가지의 사람 아니었던가. 남성과 여성을 떠나, 그저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의 정신무장으로 몰개성하게 부품으로써만 존재했던 사람들. '나'보다는 '회사'와 '사회'와 '국가'가 먼저이니 그저 시키는대로만 했던 사람들. 아니면 반대로, 위에서 시키는 일이니 내 책임은 없겠지-하며 마음과 양심을 놓고 있던 사람들. 영화는 봉현철 부장의 반성어린 편지로 연대에 대한 기존의 메시지를 한 개개인의 양심과 신념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이겨내기 위해서는 연대의 힘이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연대를 위해서는 한 개개인의 생각과 힘이 절실하다는 말. 연대가 있어야 개인이 이길 수 있다. 그러나 또 반대로 말하면, 개인이 있어야 연대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냥 모였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존재'하고 모인다. '존재'해야만 모일 수 있다. 자신을, 또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신념을 굽히지 않는 일. 모난 돌이 정 맞는 세상에서 그 정 맞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
결말부에 들어서 영화가 지나치게 순수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영화가 좀 더 오그라드는 경향이 있고, 모든 일은 말도 안 되게 술술 진행되며, 마치 <베테랑>을 보고 나서 우리가 느꼈던 것처럼 '이건 다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지' 정도의 감상으로 남는 부분도 분명 있다. 그러나 정말이지 이상하게도, 영화의 그런 나이브한 태도가 좋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의 칭얼거림 같아 귀여웠다. 그래, 마냥 현실적인 것만 보려면 영화라는 매체를 우리가 왜 보겠나. 현실을 뒤엎는,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때때로 우린 그런 경험을 위해 영화를 본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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