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5 13:31

워 호스, 2011 대여점 (구작)


개인적으로 참 여러 추억이 있는 영화다.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보며 스필버그의 장단점이 모두 공평하게 녹아있는 영화란 생각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그 낭만적인 감성이 좋게만 느껴졌었다. 그리고 아마 그 해에 뉴욕 배낭 여행을 했었던 것 같은데, 마침 거기서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공연을 하고 있더라고. 그래서 봤지. 대체 말이 주인공인 이 이야기를 무대에서는 어떻게 표현해내나-하는 궁금증에. 근데 그 공연 자체의 임팩트도 상당 했었다. 이건 백 번 말로 설명해도 모자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유튜브에 한 번 검색해보시는 걸 추천. 

스필버그는 인간이 아닌 동물이나 외계 생명체들을 다루면서도 언제나 그들이 펼치는 인간과의 소통에 방점을 찍어왔다. <워 호스>는 거의 그 집대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인간 주인공을 메인으로 두고 그 상대편으로서 비인간 캐릭터를 다뤄왔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말'이라는 동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으로 군림하기 때문이다. 인간 캐릭터들은 그저 주인공 말인 '조이'를 잠시 거쳐가는 사람들로만 존재할 뿐.

CG와 특수효과 촬영을 아예 배제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어쨌거나 실제 말로 촬영을 했어야만 하는 영화다. 그런데 촬영에 참여한 그 말들이 연기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많은 동물 배우들을 보아왔지만 이 업계에서는 단연 이 영화가 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까맣게 생기가 도는 커다란 눈동자와 세월과 고통의 흐름을 표현해내는 아름다운 갈기, 그리고 그 어떤 육체적 연기도 떠받들 수 있게 설계된 것만 같은 튼튼한 다리와 근육. 거의 온몸을 다 열어가며 말이라는 동물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감정 같은 것들이 시종일관 발산된다. 이는 분명 대단한 성취라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스필버그 영화라는 점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영국군 기병대가 독일군의 야영지를 급습하는 장면에서의 연출은 그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 스필버그가 진정으로 대단한 이유는 그가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최첨단의 신세대 블록버스터를 연출할 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워 호스>에서 그런 것처럼 고전의 풍미를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워 호스>는 전투의 스펙터클로 관객을 사로잡는 영화가 아니다. <워 호스>는 말그대로 고전적인 영화다. 광활한 풍경과 상황을 담아내는 부감, 그리고 와이드한 쇼트 사이즈 등으로 <워 호스>는 고전의 풍미를 활짝 꽃피운다. 두 집단이 치열하게 엉겨붙어 화려한 전투를 벌이는 묘사 따위는 이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엔 수십 수백 마리의 말을 탄 군인들이 노을을 등지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오후 해질녘의 광경이 존재한다. 사람 키만큼 자라오른 갈대밭 사이를 헤치고 말들이 속도를 뽐내는 그야말로 황홀경이 이 영화엔 존재한다. 그렇다. <워 호스>는 전쟁 영화로써의 스펙터클보다 고전 영화로써의 스펙터클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영화인 것이다. 결말부에는 <수색자> 오마주까지 하고 있는데 말 다 했지.

여기에 스며드는 스필버그의 담백하고도 아름다운 연출.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스필버그는 죽음을 오락적으로 전시하지 않는다. 독일군의 기관총 포화에 희생되는 영국 군인들의 모습이 이 영화에 어떻게 담겨져 있는지를 보라. 이 장면엔 그 자체로 시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소녀와 할아버지 단 둘이 살고 있는 외딴 집에 군인들이 징발을 논하며 쳐들어왔을 때를 보라. 스필버그는 인물들과 카메라 사이에 찬장 하나를 두고 그 장면을 그저 롱테이크로 찍어냈다. 이렇게 담백하고 효과적인 롱테이크가 스필버그의 기본 장기였던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결국 조이의 후반부 질주 장면이었다. 독일군의 탱크를 맞닥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무인지대의 철조망에 달려들기까지. 이 참호와 저 참호 사이를 넘나들며 전쟁터 한 가운데를 그야말로 질주하는 조이의 모습에서, 나는 '아, 내가 영화란 것을 보고 있구나'의 감상을 느꼈었다. 꽤 오랜만의 재감상이었고, 극장이 아닌 블루레이 환경이었음에도 그 감상은 여전하더라고.

단점이 없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연출은 훌륭하지만 스필버그 특유의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터치가 좀 과하게 보이는 지점도 분명 있다. 전쟁을 배경으로 이 정도의 동화를 절륜하게 뽑아내는 것 역시 특기할 만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엔 너무 순진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때에도 말했던 것처럼, 전쟁의 잔혹함과 그 참상만을 말해왔던 전쟁 장르 영화계에서 이 정도의 순진한 구석이 남아있는 것 정도는 좀 괜찮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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