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5 14:54

레베카, 1940 대여점 (구작)


멜로 드라마처럼 시작했다가 미스테리 심리 스릴러를 거쳐 법정 드라마로 끝나는 작품. "히치콕이 이런 것도 찍어?!"에서 "히치콕이 또 이런 거 찍었네"로 귀결되는 영화. 히치콕은 노량진 수산시장에서도 미스테리를 발굴해 낼 사람이다.


열려라, 스포천국!


죽음을 선택하려하는 남자 '드 윈터'의 삶에, 죽지 말고 삶을 이어가라며 소리치는 것으로 여자가 끼어든다. 좋은 영화는 첫 쇼트나 첫 씬에서 두 시간짜리 영화 전체를 요약하는 경우가 많은데, <레베카>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결말까지 보고나면 그게 '그리움'의 감정이 아닌 일종의 '죄책감' 내지는 '패배감' 때문이었다는 것으로 드러나긴 하지만, 어쨌거나 과거의 상흔에 사로잡혀 삶을 포기하려던 남자에게 그러지말라고 소리치며 여자가 등장하는 것이잖나. 이 정도면 두 시간 요약 잘 한거지, 뭐.

물론 엄밀히 따지면 영화의 첫 시작이 그것인 건 아니다. 프롤로그 역할을 하는 오프닝 씬이 따로 있는데, 그것까지 따지면 내레이션을 덧칠한 꿈으로 시작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꿈의 시점 자체는 이미 죽은 '레베카'의 것처럼 느껴지는데 정작 내레이션의 목소리는 현재의 여자 주인공이라는 것이 재미있음. 그리고 영화의 주요 공간적 배경인 맨덜리 저택을 소개하며 깔아주는 것으로도 유효한 성과를 내는 프롤로그다.

나무 하나만을 셀 수도 없이 그렸던 여자의 아버지처럼, 드 윈터도 죽은 아내만을 한없이 그렸던 로맨티스트였던것처럼보인다. 또, 여자가 지금까지의 기억을 모두 추억으로 인지하는 반면, 드 윈터는 그 기억들을 모두 악으로 인지한다. 드 윈터는 그 악마같은 기억들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려고 했던 인물이었잖아. 반면 여자는 드 윈터와 결혼한 이후 그 악마같은 과거에 똑같이 사로잡히지만, 그럼에도 드 윈터에 비해 더 강한 극복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강인해 보인다. 물론 스트레스 존나 받기는 하지만... 근데 그건 '댄버스' 부인이 스트레스 받게 한 거잖아?

본인을 찾는 전화를 받고도 잘못 걸었다며 끊어버리는 여자의 모습에서, 누군가의 그림자로 산다는 것의 슬픔과 허전함을 히치콕이 잘 보여준 것 같아 재미있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여전히 일반적인 멜로 드라마의 범주 내인 것처럼 느껴지잖아. 그러다가 갑자기 댄버스 부인이 과거 자기가 모셨던 레베카에 대해 이야기하며, 여자에게 주지도 않을 것들을 자랑하는 씬까지 와서는 광신도 같아 존나 무서워진다. 그러다보니 여러가지 해석이 덧붙여진다. 어쩌면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에게 단순 연민이나 우정이 아니라 사랑까지 느꼈던 게 아닐까? 그녀에게 레베카는 정교분리 안 된 거의 임모탄급 종교처럼 보이던데. 

여자 주인공을 통해 여백의 그림자로 사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지 보여주다가, 미스테리가 본격적으로 밝혀지는 지점부터는 반대로 그림자를 불태우는 여백으로서 죽은 레베카가 악독한 동시에 대단하게 느껴진다. 죽은 이후에도 산 자들을 지배했던 여자. 끝까지 모든 걸 갖고 놀았던 여자. 상영 시간 두 시간 내내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지만 이런 희대의 썅년이 또 있을까 싶어질 정도로 무섭고 또 강력하다. 따지고 보면 드 윈터가 레베카를 죽인 거나 다름 없었는데도 그 역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죽을 뻔했잖나. 이 정도면 레베카는 마녀고 그녀의 이름은 저주다. 

히치콕답지 않은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로 시작해 끝내는 히치콕다운 히스테리로 기어이 미스테리를 심어내는 영화. 생각해보면 <싸이코>도 그렇고, 히치콕은 전통적으로 페이크 넣는 이야기 구성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이런 이야기인 줄 알았지?-로 관객 낚다가 뒷통수 후려갈겨버리는 전매특허 연출 방식. 근데 그 뒷통수에 딜을 어찌나 잘 넣는지 맞으면 맞을수록 더 맞고 싶어지게 만드는 매혹의 연출가. 히치콕이 살아있었다면 <기생충> 존나 재밌게 봤을 것 같은데 아쉽다. 니가 왜 아쉬워

핑백

  • DID U MISS ME ? : 레베카 2020-10-27 17:46:48 #

    ... 알프레드 히치콕의 &lt;레베카&gt;를 다시 본 이유는 바로 이 영화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제목만 같은 다른 영화인 줄 알았는데, 예고편 보니까 새롭게 리메이크한 버전이 맞더라고 ... more

  • DID U MISS ME ? : 우먼 인 윈도 2021-05-20 12:36:43 #

    ... , 조 라이트라는 연출자를 우리들 가슴에 새기고야 만다. 때때로 모자라고, 또 가끔은 넘치지만 그럼에도 조 라이트라는 이름만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 어정쩡하게 히치콕 리메이크 했던 최근의 &lt;레베카&gt; 보다는, 차라리 이런 식의 히치콕 워너비가 더 나을 지도 모른다. ... more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