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프레드 히치콕의 <레베카>를 다시 본 이유는 바로 이 영화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제목만 같은 다른 영화인 줄 알았는데, 예고편 보니까 새롭게 리메이크한 버전이 맞더라고. 그래서 이 핑계삼아 오랜만에 히치콕의 <레베카>도 다시 봤고, 연이어서 이 영화까지 주르륵 관람. 보통 이렇게 원작과 리메이크작을 연이어 보게 되면 감독의 연출 차이를 더 세심하게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열려라, 스포 천국!
'맥심'과 여자의 첫 만남이 다르게 묘사된다. 원작에서는 여자가 맥심을 구해주는 것으로 시작했다면, 리메이크의 만남은 맥심이 여자에게 호기심을 갖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주체도 조금 달라진다. 원작 오프닝의 시점은 명백히 '드 윈터'의 것이었다. 그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는 찰나에 여자가 등장해 말리게 되니까. 허나 리메이크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 주인공 위주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히치콕의 원작도 진행될수록 여자 주인공 중심의 이야기로 바뀌지. 그러나 어찌되었든 초반부엔 드 윈터의 존재감이 더 강하잖아. 이에 반해 리메이크작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여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됨.
둘의 사랑을 담는 과정이 원작의 그것에 비해 좀 더 구체적이고, 좀 더 찐득하다. 원작에서 데이트라고 해봤자 둘이 드라이브하는 정도가 다였잖아, 직접적으로 묘사된 건. 이 영화에선 둘이 밥도 먹고, 드라이브도 하고, 바닷가로 놀러가서 수영도 하고, 하여간 둘이 북치고 장구치고 오만 교태를 다 떨어댄다. 보는 사람 입장에선 결국 이 둘의 관계가 이후 영화의 메인 동력으로 작용할 테니, 바로 그 점에선 나쁘지 않은 번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말해왔지만, 무너지는 관계를 묘사 하려거든 일단 그 관계가 제대로 쌓여있다는 걸 관객들에게 보여줘야하는 법이거든.
그래도 원작에서의 '댄버스' 보다는 이 쪽의 '댄버스'가 좀 더 친절한 느낌. 첫만남 때의 인상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배역이 더 커져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오리지널 댄버스가 강한 인상의 초상화 같은 단면적 인물이었다면, 리메이크 댄버스는 좀 더 인간처럼 느껴진다. 약간 더 입체적이라고 해야하나? 근데 그게 또 꼭 좋기만 한 거냐고 묻는다면 글쎄. 애초 댄버스라는 인물은 영화의 인상을 강하게 잡고 특유의 양념을 더해주는 캐릭터다. 이런 캐릭터일 수록 선택과 집중에 의거해 좀 더 플랫하게 가는 것이 좋을 때도 있거든. 이 영화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냥 더 평면적으로 센 캐릭터였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듦. 심지어 결말부에 이르르면 댄버스가 이야기의 방점까지 찍고 앉아있잖아. 그건 좀 뜬금 없더라고.
원작은 애써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팍! 치고 나가는 맛이 있는 영화였다. 그 시절 고전들이 다 그랬었지만. 하여튼 그랬던 영화였고, 그런 고전을 현재 시점에서 리메이크할 때 구체적인 설정과 장면 묘사를 덧붙이고자 하는 욕심은 당연한 것이므로 이해가 간다. 그러나 원작과 비교해서는, 아무래도 질질 끄는 느낌이 없지 않다. 원작에 존재하던 과감한 생략의 맛이, 리메이크에선 좀 부족하다고 해야할까? 모자란 게 넘치는 것보다 낫다고 해야할까?
법정 드라마가 너무 길기도 하고, 쓸데없는 서스펜스를 주려고 한 장면들도 역시 있어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만 했나-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 추가된 설정과 장면들이 그냥 사족으로만 느껴지는 거지. 근데 이렇게 잔소리만 늘어대고 있으니 좀 미안하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프레드 히치콕이 연출한 작품을 바로 직전에 본 상태에서 비교를 한다는 게...
딴 소리인데, 영국의 저택 구조와 그 인테리어 디자인이 다 거기서 거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째 최근에 봤던 <에놀라 홈즈>랑 로케이션이 좀 겹치는 것 같더라. 둘 다 넷플릭스 영화라 돌려막기 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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